청와대 관계자 문자메시지 내용 포착되며 알려져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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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북한 주민들 역시 대한민국 땅을 밟는 순간 우리 국민으로 대우 받게 된다. 통일부 등이 ‘하나원’이라는 교육기관까지 만들어 북한이탈주민들의 사회정착을 지원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정부는 대부분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귀순 의사를 물은 뒤 정착 혹은 북송 여부를 결정해왔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전례와는 사뭇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가 북한이탈주민을 사실상 ‘강제추방’ 조치한 것이다. 이들은 북한 선박의 선원으로 16명을 살해하고 도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부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어 추방”
野 “北 선원 추방 헌법과 모순”

20대 북한 주민 A씨와 B씨는 선장, 동료 선원 등 16명과 함께 지난 8월부터 러시아 해역 등을 오가며 오징어잡이를 했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원으로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선장으로부터 지속적인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것이다. 견디다 못한 이들은 지난달 말 어느 밤, 또 다른 선원 C씨와 공모해 선장을 살해했다. 이어 범행 은폐를 위해 동료 선원 15명도 차례차례 불러내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행에 사용된 도구는 둔기 종류로 전해졌다.
범행을 마친 이들은 오징어를 팔아 자금을 마련한 뒤 자강도(道)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김책항 인근으로 이동했다가 공범 1명이 체포됐다. 나머지 2명은 해상으로 도주하던 중 북한 경비정의 추격을 받았다. 북방한계선(NLL)까지 넘어온 두 사람은 대한민국 해군과 마주친 뒤 다시 이틀가량 도주극을 펼쳤다. 결국 나포당한 선박과 두 사람은 대한민국 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A씨와 B씨는 처음에 범행 사실을 부인했으나 관계기관이 도·감청으로 미리 파악하고 있던 북측의 교신내용을 토대로 추궁을 해 범죄 혐의를 자백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역시 결국 사실을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별다른 발표 없이 지난 5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이들을 추방하겠다고 전달했다. 북측은 약 하루 뒤인 지난 6일 인수 의사를 확인해 두 사람은 북한으로 송환됐다.

문자 메시지 속 내용은?

이들의 북송 사실은 통일부의 정식 브리핑이 아닌 국회에 출석한 청와대 관계자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한 언론 사진에 포착되며 먼저 알려졌다. 메시지에는 “오늘 오후 3시에 판문점에서 북한 주민 2명을 송환할 예정이다. 북한 주민들은 11월 2일에 삼척으로 내려왔던 인원들이고 자해 위험이 있어 적십자사가 아닌 경찰이 에스코트 할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 “이번 송환 관련해 국정원과 통일부간 입장 정리가 안 돼 오전 중 추가 검토할 예정이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 측 의원들은 김연철 통일부 장관에게 “당장 송환부터 멈추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송환 절차는 3시 10분경 정상적으로 완료됐다. 야당 의원들은 “북한 눈치를 보느라 사건을 숨긴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같은 날 이상민 통일부 대변인은 “정부는 지난 11월 2일 동해상에서 나포한 북한주민 2명을 이날 15시 10분경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추방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대변인은 “정부는 이들이 살인 등 중대한 비정치적 범죄로 북한이탈주민법상 보호대상이 아니며, 우리 사회 편입 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되고 흉악범죄자로서 국제법상 난민으로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추방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은 물론 국민들 사이에서도 정부의 발 빠른 추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정현 의원 등은 북한 선원 3명이 16명을 살해했다는 발표에 신빙성이 있는지 의구심을 드러냈다. 만약 살해했다고 하더라고 추방이 너무 빨랐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어떤 기준으로 어떤 범죄를 흉악범이라고 할지 신중한 기준을 정했어야 했다”며 “이번 결정은 부적절하고 성급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주먹구구식으로 우리 헌법과 모순되는 추방 결정을 비밀리에 내린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면서 “북한은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다. 북한 주민 모두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이 원칙이며, 추방된 2명이 왜 기본권을 누릴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 원내대표는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수사의 한계 등 당국 어려움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합의도 모으고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 주민에게 공포의 선례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통일부의 브리핑이 언론사보다 늦은 것에 대해서도 “북한 주민을 추방한 것을 언론사에 포착된 사진 한 장으로 들켰다”면서 “이 정도면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덮고 있는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탈주민 관련 규정은?
논란 여지 있어

현행 ‘북한이탈주민보호법’ 9조에는 북한이탈주민이 반인륜 범죄 혹은 반인도적 행위를 했거나 국외 테러활동 등에 연루됐을 때는 국내 입국을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살인 등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국내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법에는 ‘북한으로의 추방’ 역시 명시돼 있지 않다. 당연히 남북 간에는 범죄인 인도조약도 체결돼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건의 경우 아직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경우 범죄를 저지르면 경찰에서 수사를 받은 뒤 검찰로 사건이 송치된다. 이어 해당 사건을 검토한 검사가 기소·불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기소 시에는 법원에서 3번의 재판 과정을 거쳐 형이 확정된 후에야 범죄자가 된다. 나 원내대표 등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재범’ 가능성을 언급했다. 통일부 측은 “우리 국민의 신변 안전을 고려한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라며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유사한 법령 체계가 있지만 이번 사항에 적절한 규정이 없어 정보부처가 합동 회의를 해 결정했다”며 “앞으로 제도적 개선·보완 문제를 고민해보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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