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풍사건’의 강삼재 한나라당 의원이 총선을 2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또 한번 주목받고 있다. 강 의원이 ‘안풍사건’ 공판에서 “YS로부터 94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직접 실토,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강 의원은 “정치적 신의를 위해 무덤까지 모든 것을 갖고 가려 했지만 국민과 역사 앞에 죄를 짓고 싶지 않아 진실을 밝힌다”고 인간적인 고뇌를 털어놓았다.가신의 입장에서 주군과의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면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진실규명을 위해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더 용기있는 행동인가.

한 정치권 인사는 “강 의원의 돌출행동은 정치권에 미치는 충격은 차치하고라도 보스정치로 얼룩진 우리 정치권에 던지는 통렬한 자기비판으로도 읽혀진다”고 평가했다. “주군에 대한 의리냐,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하느냐.”한나라당 강삼재 의원이 ‘안풍사건’을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마침내 강 의원은 주군에 대한 ‘배신’을 선택하고 16년간 ‘정치적 부자’로 통했던 김영삼(YS) 전대통령과의 끈끈한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표적인 의리파로 꼽혔던 강 의원은 그간 사석에서 “한번 주군(YS)은 영원한 주군”이라며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왔다. “내 비밀을 무덤까지 안고 가겠다”는 결연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역사적 진실’ 앞에선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것 같다.

YS와 강의원의 정치적 인연은 1988년 13대 총선을 계기로 싹텄다. 12대 때 동교동계로 정치를 시작한 강 의원은 YS와 DJ(김대중 전대통령)가 갈라서자 13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적 연고인 경남 마산을 고려, 상도동계로 ‘이적’했다. 이후 YS의 정치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통일민주당 시절은 물론 3당합당 이후에도 줄곧 당직을 맡으며 성장했다.그러나 나이가 젊고, 정치적 뿌리가 달라 상도동계의 견제를 받아 중간당직만 맡았다. 때를 기다리던 강 의원을 YS와 한배를 탄 공동운명으로 ‘업그레이드’시킨 것은 그가 집권당 사무총장이 되면서부터다. YS는 95년 8월 강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전격 발탁, 집권 민자당의 총선사령탑을 맡겼다. 43세의 최연소 집권당 사무총장이었기에 엄청난 파격이었다. 강 의원은 수시로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YS와 독대했다. 강 의원에 대한 YS의 기대와 신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강 의원은 15대 총선에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거둬 민주계 핵심 실세로 발돋움했다. 그는 특히 계보를 양성했던 최형우, 김덕룡 의원 등과 달리 “오로지 YS계로 김 대통령과 정치생명을 함께하겠다”며 차별적 행보를 걸었다. YS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고, 강 의원은 97년 8월 사무총장을 연임했다.강 의원은 97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도왔으나, 이 후보와 YS의 관계가 악화한 뒤엔 사무총장직을 내놓았다. 그는 그 후 이회창 체제가 들어서 비주류로 물러났을 때도 여전히 YS와 교감을 나눠왔다.그러다 지난해 9월 안풍의 주범으로 검찰에 기소된 강 의원은 공범으로 기소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과 함께 1심에서 유죄를 인정, 각각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정치생맹의 기로에 서게 된다.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이 선고된 강 의원은 선고 내용에 반발하며 ‘의원직 사퇴’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올해 들어 강 의원은 “쉬고 싶다”며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지만, 최근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강 의원과 친분이 있는 한나라당의 한 재선의원은 “강 의원이 당 지도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의원직을 던진 데는 한나라당과 YS에 대한 섭섭함이 작용했다”며 “강 의원은 지난 몇 년간 이 사건에 발목이 잡혀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였지만 한나라당은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했고, ‘주군’인 YS 역시 ‘나 몰라라’ 한 데 섭섭함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따라 수차례 검찰조사와 지난 3년간의 34차례에 걸친 재판과정에서도 굳게 입을 다물었던 강 의원이 지난 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진술한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강 의원은 우선 항소심 선고가 다가옴에 따라 예상되는 가혹한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2심까지의 기록만을 놓고 판단하는 것이라 사실관계 다툼은 항소심에서 마무리된다. 강 의원은 2003년 9월 1심 선고에서 징역 4년에 추징금 731억원을 선고받았다. 따라서 이날 법정 진술로 그 돈이 안기부 돈인지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임을 김 전 대통령에게 넘김에 따라 형사처벌을 면하고 추징금 731억원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강 의원도 이날 “지난 3년간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억울하게 기소됐어도 결백을 증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며 “하지만 1심에서 유죄가 확정된 이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특히 강 의원은 자신이 굳이 김 전 대통령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으로 알았지만 결국 진실은 묻히고 자신은 유죄를 선고받게 됐다며 1심 선고가 진술 번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음을 시사했다.

강 의원은 “지금도 안기부 자금이 아니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고, 출처를 공개하지 않더라도 무죄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거듭 주장했다.강 의원의 변호를 맡은 정인봉 변호사는 “김 전대통령에 대한 도의와 역사적 진실 사이에서 번뇌하다가 결국 둘 중 더 커다란 ‘정의’를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또 “김 전대통령과의 신의를 지키려는 강 의원의 의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독을 깨지 않고는 쥐를 못잡는다’고 충고하는 등 악역을 맡아왔다”고 부연했다.이와 관련, 강 의원은 괴로운 심정의 일단을 내비쳐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정몽헌 고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과 안상영 전부산시장 등을 언급하면서 “극단적인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라며 김 전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신의를 저버리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과 번뇌가 있었음을 토로했다.강 의원은 그러나 YS와의 관계에 대해 아직도 진한 ‘애정’이 묻어나는 발언을 곧잘 하고 있다. 강 의원의 한 측근은 “(강 의원이)배신했다고 보지 말아달라”며 “정치적 신의와 인간적 의리도 중요하지만 시대가 지났다. 국민들이 용인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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