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성계는 동계(東界)의 기병 2,000명을 거느리고 제일 처음으로 입성, 저녁 무렵에 홍건적의 괴수 사유와 관선생을 참살한 후 외쳤다.
“내가 사유와 관선생을 죽였다!” 
“오합지졸들을 가차 없이 섬멸하라!” 
최영은 사자처럼 포효한 뒤에 질풍신뢰(疾風迅雷)와 같이 말을 달려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가 한 번 장검을 번쩍 후려갈길 때마다 홍건적이 피를 뿌리고 낙엽처럼 쓰러져 뒹굴었다. 최영의 용맹을 본 홍건적들은 감히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도망가던 자, 우왕좌왕 하던 자들 모두가 장검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최영은 낫으로 볏단을 베듯 홍건적들을 무수히 쓰러뜨렸다.
홍건적들은 불타는 성곽 속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고려군의 칼 아래 픽픽 쓰러졌다.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홍건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성 동북문으로 퇴각하기에 바빴다. 최고지휘관의 비참한 말로를 목격한 홍건적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여 줄행랑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망가는 병사들을 모두 살려 보낼 고려군들이 아니었다. 홍건적들은 사정없이 휘둘러대는 고려군의 창검에 찔려, 일진광풍(一陣狂風)에 나뭇잎 휘날리듯 죽어갔다. 이처럼 서로 짓밟혀 쓰러진 홍건적의 시체가 온 성안에 가득하였다. 개경 앞의 재령평야는 시산혈해(屍山血海,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룸)가 되었다. 
총병관 정세운은 명령을 내렸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 수가 있다. 궁한 도둑을 모두 잡을 수는 없다. 동북쪽의 탄현문을 열어라!”
전의가 꺾인 파두반 등 홍건적의 잔당 10여만 명은 황급히 두 갈래 길로 개경에서 도주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주했다. 이리하여 홍건적은 드디어 평정되었다. 
이 전투에서 홍건적은 무려 10만 명이 몰살당했다. 이는 고려 역사상 국난을 극복한 최대의 전승으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고려군은 성안에서 원나라 황제의 옥새 2개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배와 인장 등을 노획하였으며, 홍건적들이 내버린 갑옷과 무기, 마필과 군량 따위를 몽땅 거두어들였다. 고려는 백척간두에 선 존망의 상황에서 상하가 하나로 뭉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던 것이다. 
온 나라 백성들은 저만치 꽁무니를 빼는 침략자들을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홍건적이 물러가고 고려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튿날 승석(僧夕) 무렵.
홍건적을 몰아내고 돌아오는 개선(凱旋) 행렬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정세운은 20만 대군을 전후에 거느리고 백마를 타고 돌아오는데, 개선 행렬을 향해 풍악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연도를 빽빽하게 메운 백성들의 환영행렬은 끝 간 데를 모를 지경이었다. 승전의 영웅들은 만면에 웃음을 담으며 환호하는 백성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하였다. 연도의 백성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들의 지략을 찬탄해 마지않았다.
“홍건적이 물러갔다!”
“와! 와! 와! 고려국 만세!”
“정세운 장군 만세!”
“최영 장군, 이성계 장군, 만, 만세!”
홍건적을 물리친 개경탈환전은 제3차 요여전쟁(遼麗戰爭, 1018)에서 강감찬, 강민첨 등이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의 침략군 10만 명을 귀주대첩에서 궤멸시킨 이래 240여년 만에 외침을 물리친 장거(壯擧)였다. 정세운은 대공(大功)을 세워 일약 고려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실로 운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전쟁영웅 정세운의 죽음

간신 김용(金鏞)은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숙위할 때 시종한 사람이다. 
그는 이 공로로 공민왕 즉위 후 첨의평리, 중서문하평장사, 순군만호가 되었지만 권력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는 교활한 인물이었다. 당시 김용은 정세운, 홍의, 김보 등과 함께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서로 권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아무런 전공(戰功)도 세우지 못하여 정세운에 대해 심한 열등감과 시기심을 느끼고 있었고, 또한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 등이 홍건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우자 이들에 대한 임금의 신임이 두터워질 것을 두려워했다. 
마침내 김용은 정세운을 암살하는 음모를 꾸민다. 안우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 씌워 안우·이방실·김득배 모두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개경 탈환 후 불과 5일만의 일이다.

그해(1362년) 1월 23일. 
김용은 함께 반격작전에 참여했던 장수 안우와 이방실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다. 김용은 두 장수를 치켜세우며 취흥을 돋우었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을까. 김용은 두 장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공민왕의 밀명(密命)이라며 거짓 교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안 장군 그리고 이 장군, 정세운이 평소에 장군들을 꺼리었는데 이번 홍건적 격퇴로 큰 공을 세워서 장군들은 결코 화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소.”
“…….” 
“정세운이 전공(戰功)을 믿고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금상께서 ‘정세운이 장차 역모를 꿈꾸고 있으니 그를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소. 장군들은 금상의 어명을 받들어 만세의 충신이 되어주시오.”
안우와 이방실은 평소 김용의 교활한 성품을 못미더워했으나, 워낙 정색을 하고 임금의 교지까지 보이자 갑자기 뭔지 모를 믿음이 솟아나는 듯했다.
이렇게 김용에게 포섭된 안우와 이방실 두 사람은 동료 장수 김득배를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김득배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제 겨우 적을 격퇴하자마자 어찌 우리들끼리 서로 죽인단 말인가?”
그러나 두 장수는 억지로 김득배를 술자리에 참석케 한 다음 정세운을 초청했다. 정세운은 김용의 간계를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장수의 초청에 별다른 의구심을 느끼지 않고 응했다. 호위무사도 없이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을 가르는 날. 밤이 깊어지자 찬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별빛이 차갑고 북서풍은 세차게 부는데 외로운 기러기가 구슬피 울며 날아가고 있었다. 정세운이 술자리에 들어서자 안우는 주변에 있던 장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개경탈환의 영웅 정세운은 그 자리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무하게 격살(擊殺)되고 말았다.
한편, 이때 공민왕은 복주(안동)의 행재소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김용은 공민왕에게 교활한 밀서를 보냈다.

‘전하, 안우, 이방실, 김득배 세 사람이 전하의 밀지를 빙자해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했사옵니다. 그들이 총병관과 어떤 개인적 원한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은 전하의 밀지가 내렸다는 말만을 믿고 그들의 거사를 방관하였나이다. 전하, 신으로 하여금 총병관의 억울하고 원통한 한을 풀게 하여 주소서!’  

이에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총병관은 짐을 대신하여 군사를 지휘했는데 그 아래 있는 자가 마음대로 그를 죽였다는 것은 짐을 능멸하는 짓이다. 임금을 업신여기고 간범(干犯, 남의 권리를 침범함)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는가? 적을 격파한 공은 한때 혹 있을 수 있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용은 역적들을 법에 의하여 처단하여 후세의 징계로 삼아라.’ 

사실 공민왕은 홍건적을 격파한 대공(大功)을 세워 득세하게 된 정세운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용의 음모를 묵인 내지는 조장하여 정세운을 토사구팽시키도록 방조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이처럼 군부 실세들을 대립케 해서 그들을 상호 견제하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구사하는 냉혹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였다.
2월 초. 
공민왕은 복주를 출발하여 상주 행재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용은 목인길(睦仁吉) 등 수하 무사를 이끌고 행궁 성문에서 안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우는 개경탈환 및 정세운 제거를 공민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주 행궁 입구 중문(中門)으로 들어왔다. 
이때 궁문 수비대원들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다. 
“역적 안우는 칼을 받아라!”
안우는 저격수들의 손에 의해 목이 뎅겅 떨어졌다. 안우의 손에는 김용이 만든 거짓 교지가 들려 있었다. 안우의 죽음을 안 이방실과 김득배는 급히 몸을 피해 도주하였다. 그러나 이방실은 용궁현(예천), 김득배는 산양현(문경)에서 김용의 수하 무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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