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 재경부총리는 보기 드문 천재이다. 194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이 부총리는 경기고, 서울법대, 행정고시를 거치면서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다. 시험만 치렀다하면 수석을 ‘싹쓸이’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가 지금 한국 경제의 최전선에서 인정받는 비결은 바로 이론과 실제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현장형 이론가’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재정경제부를 최고 집권자와 안면이 있는 백면서생 대학교수가 맡거나 아니면 이론과는 좀 거리가 있는 전문관료 출신이 맡았다. 이 부총리의 발탁배경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이 부총리는 미국 보스턴 대학원과 하버드 최고경영자 코스에서 공부한 정통 이론가이고 행정고시(6회)에 합격한 뒤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재정금융심의관을 거친 정통 관료이기도 하다.

게다가 관료 생활을 그만두고 대우 반도체 대표이사와 한국신용평가 사장을 역임한 바 있어 실물경제의 생리에도 누구보다 밝다. 경제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전문 경제 관료 출신이자 현장 경험가인 셈이다. 이런 측면을 높이 사서 97년 외환위기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이회창 캠프에 참여했던 이부총리를 금융구조조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DJP 연합정권에서 김용환 의원의 천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 의원은 과거 재무부 장관 시절 이헌재 당시 과장을 책상에 끼고 살았다는 소문까지 있다. 그 정도로 이 부총리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참여정부 1년의 좋지 못한 결과가 ‘코드 인사’ 때문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도 이런 측면에서 이 부총리를 발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 탄핵 정국에서 노 대통령의 선택은 현재까지 탁월한 ‘혜안’으로 보인다. 사실 노 대통령은 이미 ‘국민경제자문회의 5인 원로위원’으로 이 부총리와 여러 번 만나 교감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럼에도 재계에서는 과거 이 부총리가 대우그룹을 정리하고, 기업간 ‘빅딜’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상황과 지금 상황이 또 달라서인지 이 부총리의 입장도 많이 달라졌다. 즉 과거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시절에는 ‘구조개혁의 전도사’로 불릴 정도로 강력하게 금융개혁과 기업 구조조정을 주창했고, 2000년 재경부총리 시절에는 기업지배, 소유구조 개혁을 주창했다. 그런데 지금은 ‘성장’을 역설하고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수출은 호조이지만 극심한 내수 부진으로 성장률이 극도로 위축되고 있어 이같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총리의 시각은 지금과 같은 내수 침체를 놔두고는 신용불량자 문제나 가계부채 문제, 청년 실업 문제 등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들의 투자 의욕을 북돋우고, ‘고용없는 성장’을 타개하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과거에 금기시 됐던 출자총액제한제 완화 같은 것도 재검토할 수 있다고까지 한 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 속에서 더 이상 구조개혁이니 기업의 체질 개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전경련 등의 경제 단체에서는 이 기회에 증권집단소송제 도입에 따른 분식회계의 일괄사면까지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청년실업과 신용불량자, 내수경기위축 등 구조적 문제를 이용하여 이 기회에 철저하게 재벌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선회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부총리는 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아직까지는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노련미와 상황파악 능력 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외환위기의 한 복판에서 구조조정을 총괄했던 그의 경력에서 볼 때 ‘위기 관리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 구조조정의 전도사로서 이 부총리의 활약에 기대했던 측에서는 이런 이 부총리의 변화에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당장 같은 정부안에서도 반발이 나오고 있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1일 “투자 활성화 정책은 정부가 확정한 ‘시장 개혁 3개년 로드맵 원칙’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하여 이 부총리의 생각에 강한 제동을 걸려고 했다. 김기원 방송대 경제학 교수는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해서는 이 부총리 자신이 하다가 중단했던 기업 금융 개혁에 다시 힘을 쏟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이 부총리는 “로드맵의 원칙에 따라 시장이 자율적인 조정 장치를 갖추면 정부 규제는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강철규 위원장의 불만을 희석하고, 나아가 “투자 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도 이런 로드맵 테두리 안에서 협조하여 나아갈 것”이라고 하여 ‘구조조정’과 ‘성장’ 이분법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흐름에 반대했다. 이런 구체적 정책 결정 외에도 탄핵정국에서 이 부총리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무리 우리 정치 경제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다고 해도 국민이나 외국 경제 주체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발빠르게 대응, ‘위기관리능력’과 카리스마를 보였다는 점이다.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의결되자 오후 2시 20분에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곧바로 금융기관장 간담회와 경제 5단체장 간담회를 열었다. 금융기관장에게는 “손절매 등 지나친 단기 대응으로 시장 불안을 확산시키지 않도록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고, 경제 5단체장에게는 “기업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경제 단체장들이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또한 당일 오후 8시에는 뉴욕 증시가 개장되기 전에 씨티그룹과 무디스 등 외국 투자 회사와 신용평가회사 관계자 등 1,000여명에게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해 달라는 공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그 다음 날에는 경제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명동 은행회관에서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을 만나 “정치 사태가 경제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윽고 서울 황학동 중앙시장을 방문해 상인들의 불안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증명하는 행보였다. 그 결과 지금 우리 경제는 예상외로 안정을 찾고 있다. 하지만 이 부총리의 강한 카리스마가 때로 지나친 ‘소신발언’으로 비화되어 논란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지난 2일 이 부총리는 정부 과천 청사 정례브리핑에서 이번 탄핵안 사태에 대해 “경제 정책의 운용과 결과를 놓고 또 다시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되느냐 마느냐의 논란이 일고 있는 현실이 상당히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 환란에 대해 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그 결과는 사법적 책임을 물을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고 야당의 탄핵 소추 이유에 경제 파탄을 든 것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한 ‘산불론’을 들어 노무현 대통령을 옹호했다. “참여정부의 지난 1년간 경제 정책과 실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출범 당시 이미 산불이 나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여기에 강풍이 시도 때도 없이 불어닥친 형국이었다”고 불가피한 정황을 설명했다.

여기서 산불이라는 것은 SK 글로벌 사태와 카드 채 사태, 신용불량자 문제 등을 말하고, 강풍은 북한 핵 문제, 이라크 전쟁, 광우병, 조류독감 등을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헌재 부총리의 책임도 문제 삼을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산불과 함께 시작했다면 그 책임은 김대중 정부 하에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과 재정경제부총리까지 역임한 이 부총리의 책임도 크다. 특히 현재 신용불량자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신용카드 남발과 카드사 부실은 상당 부분 과거 김대중 정부에 책임이 있는데, 이는 ‘국민의 정부’에 참여했던 이 부총리도 결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가당착적 진단인 것이다. 게다가 이 부총리는 입각하기 전 참여정부 경제정책을 ‘아마추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미 산불이 나고 있었고, 거기에 강풍이 불어와서 그 산불이 확산되고 있는데, 그 외부 원인을 설명하고 거기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아마추어’라고 비판하고, 지금은 그 참여정부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말을 바꾸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이다.

하여간 이헌재 부총리의 내수 증진을 통해 경제 위기 탈출을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여러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다중 신용불량자 구제를 위한 배드뱅크 조기 설립, 서비스 산업 지원대책, 특별소비세 인하, 고용창출형 창업투자 활성화 정책 등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 역시 현미경을 가지고 따지면 문제가 있겠으나 지금 최악의 경제 불황 상황에서 경제 부총리로서는 할 만한 정책을 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 부총리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의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 겸 우리은행장 취임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부총리는 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우리 금융 회장은 금융 시장의 변화와 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민간인 출신이 적당하다”고 하여 사실상 황영기 현 우리금융회장을 천거했다는 것이다. 이 부총리는 야인시절에 ‘이헌재 펀드’를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황영기 삼성증권 사장을 자주 만나 금융시장을 보는 시각을 교감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지적하듯이 황영기 회장의 취임은 단순하지 않다. 황영기 회장은 전형적인 ‘삼성 맨’이다. 그래서 비판자들은 “삼성이 이제 제 2 금융권을 넘어 은행까지 노리는 것 아니냐”며 강한 의심을 나타내고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금융지주회사 설립을 검토중인데 이미 삼성생명을 통해 우리금융지주회사와 방카슈랑스 합작 마케팅사 설립에 합의, 우리 금융지주회사의 지분 3%를 사기로 약속한 상태이다. 그런데 삼성증권 출신인 황영기 우리금융회장 선임은 단순한 삼성의 지분 참여 이상으로 삼성과 우리 금융간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헌재 부총리가 최악의 경제불황과 온갖 경제적 악재 속에서, 그리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악의 정치 불안 속에서 경제수장을 맡아 별 무리없이 한국 경제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온 국민과 세계가 이헌재 부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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