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케네디 암살 소식에 총리 보내려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왔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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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이후락 비서실장 브리핑에 참석자들 웃음 터졌다”

- 주미대사관에 근무하실 때 경험이나 기억나시는 일화에 대해서도 말씀해 달라.

▲ 그렇게 근무하다가 재외공관 근무를 받은 게 워싱턴이었다. 다들 가고 싶어하는 워싱턴에, 국장회의라고 하는 인사위원회에서 뽑아줘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부임을 했다. 당시 정일권 장군이 대사로 계셨는데, 정일권 대사는 과도정부 때 주미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다가 민주당 정부가 되니 장이욱 박사를 주미대사로 발령을 냈다. 그래서 정일권씨는 대사를 그만두고 하버드대학교에 가서 연수를 하고 있었다. 헨리 키신저 박사가 하고 있던 1년짜리 코스가 하버드에 있어서, 거기 있는데 그 와중에 5·16이 났다.

제가 워싱턴에 1962년 봄에 갔으니까 그 1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워싱턴에 그때 ‘한국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설국환씨가 계셨다. 이분이 사주 장기영씨를 잘 알았다. 설국환씨는 허정 과도정부 수반의 보좌역이었다. 말하자면 막후의 브레인 노릇을 하면서 허정 선생을 돕다가 국내정치가 복잡해지니까 일종의 피신같이 워싱턴에 와 계셨다.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서 취재도 했는데, 국무성에 도널드 맥도널드라고 하는 한국과장이 있었다. 이분은 전후 10년 한국에서 보냈고, 국무성을 그만둔 후에는 조지타운대학교의 포린서비스스쿨에서 연구교수도 하고, 한국에 관한 책을 썼다. 아시느냐? The Koreans: Contemporary Politics and Society라고 한다.

- 네. 지금도 많이 인용되고 있다.

▲ “한국은 지리와 역사에 의해서 아시아 폭풍의 핵심이 될 운명이 지어진 나라다”라는 서두로 유명한 책이다. 이분이 한국과장으로 있을 때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아시다시피 그때 당시 카터 매그루더 장군이 8군 사령관이었고, 공교롭게도 주한 미국대사대리로 마샬 그린이 있었다. 월터 매카너기 대사는 본국에 돌아가서 극동담당 차관보를 했다. 그때 이분들이 군사혁명에 의해서 합법정부를 쓰러뜨렸다고 하니까, 군사 개입을 하려는 생각을 했으며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한국인끼리 피를 적극적으로 흘리는 사태는 볼 수 없었다고 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윤보선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허락을 하면 군사혁명을 저지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한국군끼리 유혈사태를 빚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까 군사혁명이 성공했고, 워싱턴 정부에서는 그렇게 고운 눈으로 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상황이 어렵게 되니까 맥도널드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설국환씨에게 군사정부의 이익을 대변해줄 수 있는 사람을 지명해서 존 케네디 정부와 접촉을 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래서 설국환씨가 서울에도 이야기하고, 하버드에 있는 정일권씨를 급히 대사로 다시 임명해서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던 비화가 있다. 비화 아닌 비화로 다 공공연하게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주미대사관에 처음 부임한 3등서기관은 총무과로 갔다. 총무과에 갔다가 6개월, 대사비서를 6개월 한다. 그러고 나서 정무과·경제과·영사과로 가게 되는데, 처음 가서 6개월 동안 총무과를 했다. 처음으로 돈을 만져보고 수표 끊고 했는데, 항상 계산해보면 돈이 모자랐다. 없는 호주머니 돈 갖다 집어넣고 그런 총무과라서 다들 총무과를 빨리 면하려고 했다. 이후에 정일권 대사의 비서관이 됐고, 그 후에 대사가 김정렬 대사로 교체됐다. 김정렬 대사가 오시더니 “비서관이 대사보다 더 중요해. 길잡이 노릇 하는 건 비서관이야. 그러니까 좀 더 해”라 하셔서, 총무과 6개월에 비서관 1년을 했다. 그때 3등서기관으로 민수홍씨가 저와 같이 갔다. 제 중학교 2년 선배였고, 제 이종하고 같은 매동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민수홍씨 이야기는 집안에서부터 듣고 있었다. 이분도 제1차 국방부 장교 출신으로 외무부에 들어왔고, 그때 같이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김정렬 장군이 공군에 있을 때 그분 비서로 있기도 했다. 민수홍도 공군장교 출신이니까. 본인 비서가 있는데도 저를 계속 잡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케네디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미국 같은 천지에서 대통령이 암살될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 역사에 암살된 사례가 한두 명 있지 않느냐. 하루는 점심 먹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리셉셔니스트가 “케네디 대통령이 총 맞았어요”라고 하는 거다. 어디에 맞았냐고 물으니 머리라고 해서 중상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시 사무실 지하에 AP, UPA 텔렉스가 있었다. 요샌 모두 컴퓨터지만 그때는 티카가 제일 빨랐다. 가서 텔렉스를 보니까 “Kennedy was hit on head"라는, 그 유명한 AP 퓰리처상 탄 헤드라인이 나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돌아가신 게 1963년 11월 22일인데, 장례식은 24일에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장례조문 사절이 왔고, 내각수반 김현철 총리가 오신다고 돼 있다. 각국 사절로는 다 국가원수들이 온다. 샤를 드골 대통령을 위시해서 영국은 여왕이 방문했다. 그래서 우리도 대통령이 방문해야 한다는 중론이 모아지고, 김정렬 대사가 본국에 긴급전화를 해서 “꼭 대통령이 오셔야겠습니다”하고 설명했고 대통령이 오게 됐다. 그래서 김포에서 비행기 트랩에 올라가던 김현철 총리가 다시 내려오고, 박정희 대통령이 오셨다. 그 장례 때 하얀 드레스 입고 어머니 옆에 서 있던 캐롤라인 케네디 사진이 생각나는데, 그 캐롤라인이 지금 주일대사로 가 있다고 하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한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 후에 새로 부임한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국무성에서 각 사절들을 접견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접견에 갔다. 맥길 테라스라는 곳에 우리 대사관저가 있었다.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에 수행했던 이후락 비서실장이 브리핑을 하면서 “박 대통령께서 존슨 대통령을 약 20분 만나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같이 듣고 있던, 동아통신의 이은우 특파원이 “우리가 텔레비전을 지금 봤는데 드골 대통령이 15분 만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이 20분 만나셨어요?”하고 질문하니까 “아 17분 30초 만나셨습니다”라 했다. 그 대답에 다들 웃었다. 한 17분 만났다든가, 15분보다는 좀 길게 18분 만났다든가 하는 것도 아니고, “17분 30초 만나셨습니다”하니까 다들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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