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패스트 트랙(fast track) 정국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정치인은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였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대학교를 다녔지만 학생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으며, 평생 시위라는 것을 해보기는커녕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제1야당의 원내대표로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다른 야당들이 합심하여 밀어붙인 패스트 트랙 법안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며 국회 안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의 나경원 원내대표는 세상물정 모르고 자란 가냘프고 여린 부잣집 아기씨가 아닌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투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남성 의원들과 팔짱을 끼고 국회 복도바닥에 드러누워 구호를 선창하던 그녀의 모습은 과거 추미애 의원이 ‘추 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와 흡사한 ‘나 다르크’의 모습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그녀는 일약 대선주자 급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랬던 나경원 원내대표가 미국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함께 여야를 초월하여 미국과 맞짱을 뜨기 위해 출국했다. 4월 패스트 트랙 정국에서의 기개를 미국에서도 여실히 증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치적 자산이 거의 없는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지난 4월의 패스트 트랙 정국에서 마땅히 역할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조국 정국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수정당의 제단에 바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리고 지난 수요일에는 청와대 앞에서 “정부의 총체적 국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 국정 대전환을 촉구한다”며 뜬금없이 단식투쟁을 하겠다고 나섰다. 한나절도 안 돼 단식투쟁 장소를 국회로 옮기는 시행착오는 예견된 애교였다.

자유한국당 관계자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과 소득주도성장 폐기를 요구하는 의지도 담겨있는 단식투쟁이라고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뜬금없는 단식투쟁임에는 변함이 없다. 제1야당 대표에게 기대를 할 수 없는 이유이며, 내년 총선에서 보수부활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에는 나경원 원내대표가 있다. 조국 정국에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기라는 사적인 인연을 뒤로하고 조국을 정조준 하여 결국 조국 법무부장관의 사퇴를 이끌어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나경원 원내대표는 자신의 아들과 딸이 구설수에 오르는 희생마저도 감수했다.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사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지난주에는 패스트 트랙 관련하여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도 받았다. 자유한국당의 현직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이다. 패스트 트랙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었던 야당 원내대표로서 조사에 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검찰수사와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는 정치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소환을 앞둔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나경원 원내대표가 패스트 트랙 정국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에 대해 십자가를 지는 책임을 져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나경원 원내대표에 대한 내년 총선 불출마 압박은 그 일환이다.

‘작은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걱정하고, 큰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걱정한다’는 격언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리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미국에서 이인영, 오신환 두 원내대표와의 담판을 통해 새해 예산을 확정하고 공직선거법, 공수처법 등 패스트 트랙 법안에 대한 일괄타결, 그리고 그 책임으로서 내년 총선 불출마를 기대한다면, 그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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