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무산 시도 아니냐’…계엄 기간에 숨겨진 비밀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사진=황기현 기자]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사진=황기현 기자]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계엄령은 국가가 비상사태 등에 돌입했을 때 국가의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법 일부의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 긴급권의 하나다. 대한민국에서 계엄령 선포는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실제로 건국 직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주도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 6·25 전쟁 등 국가에 환란이 발생했을 때 계엄령을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들어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집회 등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자 수차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시위를 무력 진압하기도 했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뒤 계엄령은 역사 교과서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 됐다. 그런데 이 계엄령이 지난 ‘촛불 대선’ 직전 또다시 국민을 탄압하는 데 쓰일 뻔 했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필사본에서는 흐릿해 보이지 않던 부분 추가 공개
군인권센터 “명백한 내란음모죄, 왜 수사하지 않는지 궁금”

박근혜 정부의 계엄령 선포 관련 의혹은 지난 2016년경부터 제기됐다. 추미애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계엄령을 준비한다는 정보가 돌고 있다”며 친위 쿠데타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가 계엄령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는 쓰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문서 등의 근거가 없었기에 추 전 대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18년 7월 5일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 방안’의 일부를 입수해 공개함으로써 박근혜 정부가 실행 가능한 계엄령을 계획했을 가능성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해당 문건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기각 시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의 자의적 위수령 선포를 시작으로 수도 서울을 비롯해 대한민국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체포해 국회를 무력화시키는 내용이 담겼다. 또 전방 사단과 특전사를 비롯한 핵심 병력을 전국에 전개해 국회와 정부 부처, 전국 지자체를 장악한 뒤 언론을 검열해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계획도 있었다. 문건이 공개된 후 국가를 수호해야 할 병력들을 임의로 이동시키려고 했던 군 내부의 안보관이 지적받기도 했다. 문건이 발표되자 군인권센터는 사건과 관련된 김관진 당시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당시 국방부장관을 내란음모죄 혐의로 고발했다.
문건 첫 공개 다음 날인 7월 6일에는 군인권센터가 PDF 형식의 문건 전문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계엄령 선포와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의 조직도와 계엄사령부 조직도, 전국에 동원할 육군 사단들과 투입 계획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또 구체적인 병력 규모와 부대 배치 계획, 사단명 등도 명시돼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7월 9일에는 문건의 또 다른 내용이 드러났다. ‘통수권자의 안위를 위한 군의 역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국면별 대비방안’, ‘현 시국 관련 국면별 고려 사항’ 등의 대외비 문건에는 박 전 대통령 퇴진 1차 집회 이후 ‘시위대의 청와대 점거 시도’나 ‘대통령 하야·탄핵’, ‘대통령 유고로 계엄 상황 발생’ 등 시나리오에 대한 대응 방안이 담겨 있었다. 시위 진행 초창기부터 계엄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 ‘불기소’ 결정

검찰은 계엄령 문건의 실체가 드러난 후 이와 관련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 끝에 이들을 ‘불기소’ 처분하기로 했다. 계엄령 문건 작성에 가장 직접적으로 연루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해외로 도피해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다. 검찰은 불기소 이유 통지서에서 “조현천의 진술을 들어보아야 피의자의 관여 여부 등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군인권센터는 수사 결과가 담긴 문건에 서울중앙지검장의 직인이 있다며 당시 중앙지검장인 윤석열 총장의 책임을 요구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대검찰청은 곧바로 ‘기무사 계엄령 문건 합동수사단’은 검찰조직과 별개로 구성된 것으로 윤 총장은 수사단 지휘 보고 라인이 아니며 관련 수사의 진행·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군인권센터 “2개월·9개월 계엄 기간, 대선 무력화 시도”

계엄령 문건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던 지난 20일, 군인권센터는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계엄령 문건에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무산시키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 센터는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난 10월 21일 공개한 기무사 계엄 문건 ‘현 시국 관련 대비계획’ 문건 내용 중 충격적인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다”며 이 같이 밝혔다.
센터는 한 매체에서 조작 의혹을 제기했던 문건에 대해 “10월 21일자 공개 문건은 제보자 보호를 위해 필사본을 공개한 것”이라며 “제보된 문건 내용 중 흐릿하게 인쇄돼 필사할 수 없는 부분이 한 곳 있었다”고 설명했다. 센터에 따르면 이 부분은 문건 ‘8-1’ 쪽 하단 ‘탄핵심판 선고 이후 전망’ 중 마지막 줄로, ‘국가비상사태 조기 안정화를 위한 비상계엄 선포 필요성 대두’ 상단에 딸린 캡션이었다.
센터 측이 공개한 ‘8-1’ 쪽 해당 부분에는 계엄 수행기간을 ‘인용시 2개월 / 기각시 9개월’로 각각 정하고 있다. 탄핵 심판이 선고된 지난 2017년 3월을 기준으로 탄핵이 인용될 경우 같은 해 5월까지, 기각될 경우 동년 12월까지 계엄령을 시행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센터는 “이는 매우 충격적인 대목”이라며 “계엄 수행기간의 구체적 적시가 의미하는 바는 19대 대통령 선거 무산”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가 반정부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선고한 뒤 당시 야당 정치인들을 체포, 구금하고 독재 정권을 창출하려 했다는 것이다. 센터는 “계엄령 문건은 대선 일정까지 고려한 매우 구체적인 ‘내란 계획’ 문서였다”면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계획의 전모를 정말 몰랐나. 검찰은 부실 수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센터 측은 “2개월과 9개월의 계엄 기간만으로 대선 무력화 시도를 계획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계엄령은 통상 기간을 정하지 않는다”면서 “사회가 언제 안정될 줄 알고 기간을 정하느냐. 기간을 정한 계엄은 대선 무력화를 위한 것이라고 본다”고 대답했다. 또 “계엄 기간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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