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 철거·금지 논란

한국외대 캠퍼스에 붙은 대자보 [사진=황기현 기자]
한국외대 캠퍼스에 붙은 대자보 [사진=황기현 기자]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자주 독립을 부르짖으며 중국 당국과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서 싸우고 있는 홍콩 시위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가운데 시위의 불꽃이 대한민국 대학가로 옮겨 붙는 모양새다. 얼마 전 홍대입구역 인근에 설치된 ‘레논벽’(Lennon Wall)을 중심으로 시작된 국내 대학생들의 홍콩 지지 시위는 연세대 현수막 훼손 사건을 계기로 여러 대학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 연세대를 비롯해 서울대와 홍익대, 아주대, 한국외대 등 다수의 대학에서 중국 당국을 비판하고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가 게시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외대에서 ‘학생 간 갈등’을 이유로 설치된 대자보를 철거하고 ‘게시 금지’ 조치를 내려 논란이 일고 있다.

외대 “학생 간 갈등 우려해 내린 조치”
학생들 “학교 사과하라”

한국외대(이하 외대)는 지난 19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본교 캠퍼스 내 게시판에 붙어 있던 홍콩 시위 관련 게시물 중 외부단체 이름의 대자보를 모두 철거했다. 학교 측은 대자보를 철거한 뒤 ‘홍콩시위 대자보 부착에 대한 학교 안내문’을 대신 게재했다. 안내문에서 외대 측은 “최근 홍콩 시위와 관련해 많은 논쟁과 갈등이 발생했다”며 “지난주에는 외부단체와 중국 유학생들 간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분별하고 자극적인 대자보와 유인물 부착으로 갈등관계가 계속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표현의 자유와 개개인의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학교는 우선적으로 학내 구성원들의 안전을 지키고 면학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대자보를 철거했다는 것이다.
외대는 또 “앞으로의 상황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의사표현으로 인해 학내가 혼란에 빠지고 질서가 훼손된다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며 “더욱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물리적인 충돌로 인한 인명 피해를 생각한다면 학교는 현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교는 현재까지 일련의 상황들을 고려해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상황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외부단체의 홍콩 시위 관련 대자보 교내 부착이나 관련 활동을 제한하겠다”며 “학교의 허가 없이 활동하여 발생하는 모든 상황의 책임은 해당 단체에 있다”고 전했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홍콩 시위지지 학생들의 모임인 ‘홍콩의 진실을 알리는 학생모임’의 대자보 역시 철거됐다. 해당 모임은 홍콩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대학마다 ‘레논벽’을 설치하고 대자보를 부착해온 바 있다.

학생들 “대자보 철거, 정당화될 수 없어”

학생들은 학교 측의 대자보 철거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21일 ‘홍콩 항쟁을 지지하는 한국외대 학생들’과 직원노조는 외대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학교 당국은 홍콩 시위지지 대자보 무단 철거를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대학 안에서 다양한 담론과 학생들의 의사표현은 적극적으로 장려돼야 한다”며 “이를 두고 폭력이 발생한다면 폭력을 막는 게 교육 기관의 의무”라고 비판했다. 이어 “서울대와 고려대, 한양대, 전남대 등 전국 대학에서 홍콩 항쟁에 대한지지 입장이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토론회와 집회도 열리고 있다”면서 “이견과 갈등을 이유로 의사표현 자체를 막는 대학은 한국외대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지적했다. 참가자들은 “홍콩 항쟁 지지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학 측에 대자보 철거 사과와 부착 제한 방침 철회, 재발 방지 약속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전날 외대 총학생회도 입장을 발표했다. 총학생회 비상대책위는 지난 20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반대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일방적 철거를 강행한 학교 본부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학내 구성원이 민주적으로 지켜온 담론의 장인 대자보를 철거하는 것은 어떤 사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캠퍼스에는 ‘학교 비판’ 대자보 줄이어

지난 20일과 21일 찾은 외대 캠퍼스에는 학교의 대자보 철거 행위를 비판하는 대자보가 여럿 붙어있었다. ‘대자보 부착 제한을 규탄하는 외부단체가 아닌 학교 구성원’이라는 주체가 작성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대자보에서 작성자는 “공론장이란 무엇인가? 공론장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대의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학교에게 묻는다. 학교는 최근 홍콩 사태에 관한 대자보 부착과 이를 통한 의견 표출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본 사태를 학교는 단지 갈등과 반목으로 치닫는 위험으로 폄하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홍콩 시위 지지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노동자연대를 사실상 겨냥, 외부 단체로 규정하고 대자보 부착을 제한할 것을 밝혔다”면서 “학교는 외부단체의 대자보 부착 및 안전을 핑계로 발전 중인 공론장을 훼손하지 말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대자보 ‘한국외대 당국은 중국 정부의 편에 서서 홍콩 항쟁지지 표명을 가로 막으려는 것인가?’에서는 “사실상 시진핑 정부, 캐리람 정부 지지하는 한국외대 당국”이라는 강도 높은 비판이 나왔다. 대자보를 작성한 노동자연대 한국외대모임 오수민 학생은 “홍콩 항쟁 지지를 표명하지 말라는 것은 중국 정부와 일부 중국 본토 유학생들의 요구”라며 “학교 당국은 물리적 충돌을 협박하는 측의 입장에 서서 홍콩 민주 항쟁을 지지하는 학생들을 협박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어 “민주적 토론과 논쟁은 한국외대 학생사회가 수십 년간 지켜온 전통이다. 학교 당국이 이를 감히 침해하려 든다”며 “학교 당국이 개입해 대자보를 강제 철거한 것이야말로 ‘불미스러운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재학생들이 학교 당국의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외대 측은 아직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폭행 사건도 발생…점입가경

홍콩 시위를 둘러싼 한·중 학생들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명지대학교에서는 최초로 폭행 사건까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일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따르면 전날 오후 10시경 명지대 캠퍼스에서 한국인 학생과 중국인 유학생 사이에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학생들은 학생회관 로비에서 ‘홍콩 시위 지지’ 대자보를 두고 시비가 붙은 것으로 확인됐다.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며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진 홍콩 시위 지지가 어떤 결과를 빚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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