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영 소장
엄경영 소장

표창원·이철희 의원이 10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민주당의 물갈이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 안팎에선 3∼4선 중진들도 대부분 물갈이 대상이란 말이 돌았다. 11월 중순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불출마 선언은 기름 붓는 격이 됐다. 86그룹 전반으로 물갈이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세대교체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임 전 실장의 결단은 물갈이를 촉진해 현장에서 고전하는 신인들에게 길을 열어 주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충격은 오래가지 않았다. 현역 의원들은 물갈이 여론 확산과 청와대 출신 정치 신인들의 도전에 반발했다. 우상호 의원은 임 전 실장도 86그룹 용퇴론 확산엔 당혹스러워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이 27일 작성한 다면평가 명단엔 의원 118명이 이름을 올렸다. 명단에 없는 11명은 의사가 없거나 요건이 안 되는 경우다. 공식적으론 9명이 불출마 입장을 밝혔다. 이해찬 대표, 진영 행장안전부장관, 표창원·이철희·이용득·서형수 등 대부분 직간접적으로 불출마를 밝힌 의원들이다. 현직 장관들이나, 불출마가 예상됐던 대부분의 중진들은 명단에 포함됐다.

당초 기대와 달리 민주당 물갈이 폭은 미미한 셈이다. 한편에선 자리 바꾸기가 물갈이로 포장되는 경우도 많다. 진 장관 지역구에선 권혁기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뛰고 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장관 지역구에선 윤건영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 출마가 거론되고 있다. 입각한 의원 지역구에서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청와대는 12월 초중순경 국무총리를 포함하여 중폭 개각을 단행한다는 방침이다. 지역구를 둔 현역 의원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와 여야 정치권 협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총리 후보로 김진표 의원, 법무부장관 후보에 추미애·전해철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4선의 원혜영 의원도 입각 대상에 올라 있다.

입각설 이면에는 지역구를 노리는 ‘실세’들이 함께 거론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역 의원이 출마 대신 정부 요직으로 옮기고 그 자리를 청와대 출신들이 차지하는 시나리오다. 자리 바꾸기인 셈이다. 컷오프, 전략공천 지역 지정, 자리를 옮기는 현역 의원의 전폭적 지원으로 공천·당선에 기여할 수 있다.

자리 바꾸기는 물갈이와 거리가 있다. 겉으론 물갈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헐리웃 액션에 가깝다. 민의에 부응한 척 하면서 낙하산을 꽂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 정부 요직을 흥정의 수단처럼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장관은 부처를 통할하고 국정운영 성공에 기여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려면 적재적소에 맞는 인물을 찾아 배치하는 게 정도다.

바닥 분위기는 대체로 민주당에 우호적이다. 지역 사정에 따라서 공천이 곧 당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지역구에는 최대 수십 명까지 정치 신인들이 공천을 바라며 뛰고 있다. 현역 의원이나 지역위원장에 맞서 힘겹게 경선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에게 전략공천 지역 선정이나 청와대 경력의 낙하산은 사망신고나 다름없다.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자리 바꾸기는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는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어 대응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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