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흥왕사(興王寺)의 변(김용의 난)

김용(金鏞)은 정세운을 제거하고 세 명의 장군을 처형한 뒤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점점 불안해졌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가 탄로날까 두려운 나머지 공민왕마저 제거하려 했다. 
이때 수하들 중 김수가 정보보고를 했다.
“주군, 조정에서 원나라에 있는 최유와 내통하고 있는 국내의 가담자들을 비밀리에 색출하고 있습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어 조련이 거사의 결행을 부추겼다. 
“주군, 임금이 우리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습니다. 실기를 하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됩니다.” 
한편, 김용의 배후에는 원나라의 기황후가 있었다. 기황후는 공민왕 폐립 조치의 일환으로 최유 등 부원세력과 한패가 되어 먼저 고려 내의 김용을 사주하여 고려 조정을 전복시키려했던 것이다. 

3월 1일 새벽 4시경이었다. 
김용은 마침내 공민왕을 시해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수하 50명과 함께 복면을 하고 흥왕사의 행궁을 침범하였다. 겁에 질린 호위 병사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그리하여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사 김한용이 그들의 손에 죽었다. 그때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은 자기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김용이 보낸 자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을 시종하고 있던 환관 안도적(安都赤)은 얼굴 생김새가 임금과 비슷했다. 그는 환관 이강달(李剛達)에게 비장한 말로 지시했다.
“자네는 임금을 등에 업고 창문으로 피신하여 명덕태후의 밀실로 숨어들게. 나는 임금의 침전에서 역도(逆徒)들을 유인하겠네.”
뜻밖의 변고에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역도들이 대비전까지 쫓아왔다. 노국공주가 대비전 마루로 나와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무엄하다!”
“전하를 보호하러 온 병사들입니다.”
“전하는 내가 보호할 테니 썩 물러들 가라!”
“…….”  
잠시 후, 침전으로 들이닥친 역도들은 침전에 누워있는 안도적이 왕인 줄 알고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칼로 난도질해버리고 만세를 불렀다. 안도적은 임금 대신 의로운 죽음을 선택하였으며,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이강달이 명재경각(命在頃刻)에 달린 공민왕을 명덕태후의 밀실에 숨겨 목숨을 보존케 하였던 것이다.
다음날, 김용은 공민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수하들로 하여금 궁중의 모든 일을 관장토록 명하였다. 그리고 개경에 머물고 있던 재상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재상들이 왕의 복을 비는 행사가 열리는 묘련사(妙蓮寺)에 참가했다가 사변 소식을 듣고 순군(巡軍)들을 소집하여 반란세력을 토벌하려던 순간이었다. 이때, 김용은 묘련사에 나타났다. 김용은 상황이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자 능청을 떨며 유탁에게 반란소식을 전했다.  
반란소식을 들은 밀직사 최영, 밀직부사 우제, 지도첨의 안우경 등은 개경에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행궁으로 와서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고 공민왕을 무사히 구출하여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된 후 김용은 어이없게도 반란 진압에 대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흥왕사에 침입한 잔당 90명이 체포되었고 심문을 맡은 김용이 그들을 심문하지 않자 의심을 받게 되었다. 결국 김용은 그 죄책이 발각되어 밀성군(밀양)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계림부(경주)로 이배(移配)되었다. 
공민왕은 이제현의 손자 이보림(李寶林, 이서종의 아들)을 안렴사에 임명하여 김용을 국문토록 하였다. 이보림은 남원부사로 있을 때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못 걷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정을 베풀었고, 경산부사 재임 시에는 어려운 송사를 잘 처리하여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당시 이보림이 경산부사로 있을 때의 명판결이 조정에 회자되고 있었다.

한 나그네의 말이 느닷없이 보리밭에 뛰어들어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를 마구 뜯어먹어 피해가 자못 컸다. 보리밭 주인은 변상을 요구했고 말 주인은 여름이 되면 변상하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수확기가 되자 말 주인은 “우리말이 뜯어 먹은 보리에서 이삭이 나서 수확을 했는데 뭐가 문제냐?”며 약속했던 변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보리밭 주인은 그를 관아에 고소해 버렸다.
이보림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말 주인은 앉고 보리밭 주인은 서서 달리기 시합을 한다. 지는 자에게는 벌을 주겠다!”
말 주인은 볼멘소리로 불공평함을 호소했다.
“사또, 저 사람은 서서 뛰고 저는 앉아서 뛰어야 하니 어떻게 제가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보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입장만 생각하느냐! 뜯어 먹히고 난 뒤의 보리이삭이 보통 보리이삭처럼 수확이 제대로 될 수 있었겠느냐 말이다!”
그리고 말 주인에게 곤장을 치고는 보리 값을 약속한 대로 물어 주도록 했다.
말 임자는 공연히 꾀를 부리다 도리어 곤장까지 얻어맞고 보리 값은 보리 값대로 물어주고 말았다. 

명판관 이보림이 김용의 죄를 엄중하게 추궁하자 김용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내가 8년 동안이나 재상으로 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은 못 해본 것이 없는데 왜 임금을 해치겠는가? 나는 단지 문하시중 홍언박을 제거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이에 임견미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전하의 침소에서 안도적을 죽였느냐?”
김용은 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국문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좌우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이 세상에 정말 믿을 자가 없구나!”
이후 김용은 사형틀에 올라 사지가 찢겨져 전국에 흩어지고, 머리는 개경으로 보내져 저자에 효수(梟首)되었다. 
한편, 제자 이색으로부터 홍언박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이제현은  말을 잇지 못하며 애통해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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