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최루탄을 쏘고 선풍기를 돌리면 시위대 쪽으로 간다고 하더라”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미국 근무를 마치고 1964년에 귀국하셔서 동북아과에서 일본 관련 업무를 하셨다. 그것이 외무부 내에서 일본 업무와 직접 관계된 최초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나?

▲ 그렇다. 일본 관련 일로서는 처음이다. 외무부에 들어와서는 정보과·여권과에 있다가 국제기구를 거쳐서 미국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당시는 재외공관 근무 기간이 2년이었다. 그래서 1962년에 갔다가 1964년에 돌아오는데, 돌아와서 발령받은 데가 동북아과였다. 그때만 해도 동북아과가 한일회담을 제1선으로 주관하는 과였고, 그것이 제일 큰 이슈였기 때문에 ‘한일회담에 관계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출근하는 날이 6월 3일, 6·3사태가 일어난 때 아침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중앙청, 광화문 네거리를 향한 옛날 정부청사, 옛날 조선총독부 건물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 동북아과 사무실이 4층에 청사를 향해서 오른쪽에 있었다. 아침에 바깥을 내다보니까 광화문이 새까맸다. 그때는 학생들이 다 검은 옷 입지 않느냐. 학생들이 시위한다고 가득 있었다. 조금 있으니 청와대 쪽에서 GMC 트럭에 큰 선풍기를 싣고 내려갔다.

- 2~3m 되는 높이였다.

▲ 그게 여러 대가 광화문 쪽으로 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신참자 비슷하게 생소해서, 저걸로 뭘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최루탄 쏘고 나서 돌리면 시위대 쪽으로 간다는 이야기다. 한참 있으니까 “와” 소리가 광화문에서 나는데, 조금 있으니 그 GMC 트럭에 학생들이 탔다. GMC 트럭을 학생들에게 빼앗긴 거다. 그렇게 학생들이 중앙청으로 왔다. 요새는 광화문이 중앙청에 있지만 그때는 광화문이 거기 없을 때다. 지금 같은 담이 아니고 울타리가 있었다. 울타리가 높지 않으니, 학생들이 넘어서 “와” 하고 종합 청사로 달려들었다.
종합청사는 서양 궁전과 마찬가지로 문을 닫으면 돌집에다 완전히 요새라 학생들이 밖에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 경찰들은 시위대를 다시 밀어내기를 반복하는데, 학생대표들이 외무부장관을 만나서 담판하겠다고 했다. 김·오히라 메모를 보자는 요구였다. “나라 팔아먹었는데, 당신들은 아니라 한다. 그러니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눈으로 봐야겠다”는 거다. 그래서 학생대표를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이 만나서 국장에게 김·오히라 메모를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우리가 캐비넷에서 꺼내서 줬다. 그때 처음 보는데 김·오히라 메모라는 게 아주 작은 종이에 연필로 적은 거다. 그래서 연필로 적어서 하나는 오히라 외무대신이, 하나는 김종필 씨가 가져와서 정부에 보고한 뒤 우리가 보관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그걸 보고 나갔는데, 그렇게 시위가 요란하니 저녁 때가 되어서는 계엄령이 선포된 거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그 후에 한일회담이 계엄령 선포하에 진행이 됐다.
저는 그때 돌아와서 평화선 문제와 어업협정을 담당했다. 청구권은 틀이 잡혔으니까 남은 것은 평화선을 어떻게 하느냐였다. 평화선이 결국 어업 문제니까 평화선 문제 담당이 곧 어업 문제 담당이었던 거다. 당시가 7차 한일회담의 마지막이었는데, 현재 상태의 평화선으로는 일본하고 타협이 안 됐다. 그때만 해도 3해리가 영해일 때다. 그러니까 일본은 “12해리까지는 전관수역이라고 인정하겠다. 그 이상은 안 되겠다”고 하다가, 그 이후에 규제수역이라는 것을 만드는 체제로 가자고 하는 거다. 현재의 전관수역과 평화선 사이 중간쯤 되는 데다 규제수역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조업하는 일본 어선들의 수나 어업량 등을 규제한다는 거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이 평화선을 끌어내려야 할 거 아니겠느냐. 그러지 않아도 나라 팔아먹었다 하는데, 이번에는 영토를 팔아먹는다고 할 텐데, 우려됐다. 그런 안을 가지고 그때 과장, 국장, 그리고 담당인 제가 청와대에 브리핑하러 갔다. 저는 차트를 짊어지고 가서 차트를 넘기고 과장이 보고를 했다. 대통령이 다 듣고 나서 “한·일 국교정상화를 하는 것이 지금 우리 국익에 맞는 일이니까 해야 한다. 그것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에게 맡기자”는 말씀을 하신 것이 최종적으로 지금 기억에, 귀에 쟁쟁하다. 그렇게 말씀을 하니 정일권 총리가 일어서서 “내각의 제1보좌관으로서 각하의 뜻을 받들어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하고 끝났다. 프라임 미니스터, 즉 총리가 스스로를 제1보좌관이라 칭한 거다. 그 두 이야기가 굉장히 기억에 남는다.

- 지금 말씀하신 그 회의가 정부의 관계 부처 회의인가?

▲ 관계 각료 회의다. 1964년에 있었다. 제7차 한일회담이 시작이 된다. 1965년 2월에는 기본조약이 가조인된다. 그러한 테두리 속에서 마지막에는 하코네에 가서 문안 작업을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어업 세력이 일본의 수십 분의 일밖에 안 되니까, 어업회담 할 때 일본 측이 우리에게 “지금은 그렇지만 2~3년 내에 한국 어업이 일본 어업을 따라잡습니다”하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때 받은 어업차관 9000만 달러로 우리가 배를 만들면서 우리 수산 세력이 급팽창을 한다. 그리고 곧 원양으로 나가서 원양에 종사한다. 이후 1990년대 중반쯤 되니까 이번에는 한국 어업자들이 일본 근해에서 어업을 하게 됐다.

- 상황이 역전됐다.

▲ 그렇다. 20년도 안 되어서 상황이 역전되는 것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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