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제가 책임을 지기 위해 귀국했습니다.”지난 15일 오전 5시 20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인천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해외로 도피한 지 꼭 5년 8개월만이다. 김 전 회장이 입국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을 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들, 대우 직원들, 시민단체 사람들이 한데 엉켜 공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국장을 나서는 그의 손에는 작은 쪽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김 전 회장은 취재진들이 심정을 묻자 미리 준비한 말이 있는 듯 쪽지를 쥔 손을 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는 심정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 채 이내 검찰 관계자들의 손에 넘겨졌다.

“죄송하다”는 단어가 그가 내뱉은 말 전부였다. 그의 입국 장면이 공개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국내 재계 서열 2위인 그룹을 이끌었던 수장의 초라하게 변해버린 모습 때문이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그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타이틀이 붙는다. 최근까지 그는 ‘해외로 도피한 재벌총수’, ‘무책임한 경영인’ 등 부정적인 타이틀을 달고 다녔다. 하지만 한때 그는 재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김 전 회장은 지난 80년대에는 ‘혜성처럼 떠오른 경영인’으로 불렸다. 지난 90년대에 그의 이름 앞에는 ‘샐러리맨의 우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000년에는 ‘몰락한 재벌 총수’로, 최근에는 인터폴에 수배를 받는 처지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김 전 회장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지만, 재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편이다. 재계의 대표격인 전경련이 드러내놓고 그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선처를 바란다”고 말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강신호 전경련 회장은 지난 7일 공식석상에서 “김 전 회장이 국가 경제에 기여한 부분도 감안됐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생애에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15살때 신문팔이로 네식구 먹여살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김 전 회장은 1936년 12월19일 부친인 고 김용하씨와 고 전인항씨 사이에서 5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고향은 원래 제주도인데, 그는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김 전 회장의 집안은 원래 사업을 하지도 않았고, 그다지 부유하지도 않았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오히려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을 정도다. 이는 김 전 회장이 지난 89년 발간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50년 6·25가 터졌을 당시, 아버지는 납북되고 형은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나는 15살이었는데, 졸지에 어머니와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문팔이가 전부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루를 공치면(놀면) 네 식구가 밥을 굶어야 했다. 이런 절실함이 나를 1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뛰어다니게 했다.” 그의 가정형편이 무척 어려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열의가 대단했던 듯하다. 그를 포함해 다섯 형제들이 모두 대학교를 졸업했을 정도니 말이다. 훗날 김 전 회장은 어머니에 대해 “자식들을 위한 무조건적인 헌신, 억척스러움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 전 회장은 195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도 그의 집안은 어려웠다. 대학교 재학시절, 그는 틈틈이 관공서 등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해에 취업을 했는데, 한성실업이라는 곳이었다. 한성실업은 섬유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무역회사로, 김 전 회장의 전공(경제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의 먼 친척 아저씨가 이 회사의 사장이어서 그가 취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김 전 회장은 조그마한 중소기업에서 제일 먼저 맡은 업무는 은행 담당이었다고 한다. 한성실업은 무역을 하다보니 은행과의 거래가 잦았다고 한다.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김 전 회장은 이곳에서 차츰차츰 무역 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직장생활 7년만에 창업

그는 아주 평범한 20대 중반의 샐러리맨이었다. 그런 그가 비범한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무역업을 하면서부터. 그는 이 회사의 제품인 ‘트리코트’라는 상품을 동남아에 팔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은 영업망을 뚫었는지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김 전 회장은 직장생활 7년 만에, 독자적인 길을 선택한다. 대우그룹의 모체가 되는 대우실업을 창업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서른 둘이었다. 김 전 회장은 자본금 500만원을 들여 직원 5명과 함께 서울 명동에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차렸다. 그와 ‘평생지기’가 된 이우복(전 대우그룹 부회장)씨도 함께였다. 그가 창업을 한 1967년부터 20년의 기간은 그의 인생에 있어 황금기이자, 국내 재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때였다. 김 전 회장은 특유의 영업력과 순발력으로 회사의 규모를 차츰차츰 키워나갔다.

매년 새로운 회사 인수

그는 사업을 시작한 이듬해에 부산에 봉제공장을 가동시키고, 인근의 섬유회사를 인수하며 수출에 열을 올렸다. 김 전 회장은 회사를 설립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국내 수출 기업 순위 2위를 기록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은 정부에서도 인정하는 수준이 됐다. 김 전 회장은 지난 70년 철탑산업훈장, 71년 동탑산업훈장, 72년 금탑산업훈장을 매년 받으며 이름 석자를 날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의 야심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다. 김 전 회장은 지난 73년 ‘한국의 경영자상’을 받자마자,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 73년에는 한국투자, 동양증권을 인수했고, 74년에는 건설, 기계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지난 76년에는 한국기계, 대우중공업, 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를 각각 인수하며 그룹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재계를 통틀어 김우중 전 회장만큼 공격적인 경영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그만큼 주목받은 사람도 없었다. 김 전 회장의 사업 스토리는 어느새 ‘신화’가 돼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다른 재벌그룹 총수들이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은 ‘2세’라는 점과는 달리, 평범한 직장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우그룹에 몸담았던 관계자의 얘기다. “90년대 들어서 대우그룹의 덩치는 점점 커져갔다. 당시 재계의 순위는 현대, 삼성 순이었다. 대우가 1위였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대우에 몸담고 있는 종업원들의 생각은 다른 그룹 직원들과 달랐다. 김 전 회장은 종종 ‘나도 여러분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월급쟁이지만, 그룹의 총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대우맨들에게 우상이었다.” 김 전 회장이 얼마나 상징적인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경영’이 발목 잡아
이즈음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을 주창한다. 그가 내놓은 자서전의 제목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였다. 김 전 회장은 잇따라 해외 점포를 늘리기 시작했고, 지난 86년 대우차 ‘르망’을 수출하며 해외에서도 인지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지난 98년 대우그룹은 계열사 41개, 국내 종업원 11만명, 해외법인 400여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즈음 어느새 김 전 회장에게는 불운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부르짖은 ‘세계 경영’이었다. 김 전 회장은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려 부실 기업을 인수하고, 또 그 기업을 바탕으로 불도저식 경영을 하던 와중이었는데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IMF 한파가 불어닥쳤고, 이는 김 전 회장에게 직격탄이 되고 말았다. 김 전 회장과 정치권의 수많은 ‘밀약설’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즈음이다. 세간에는 그가 그룹이 침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많은 정치권과 금융권의 핵심 인사들에게 긴급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측의 돈이 이들의 비자금으로 쓰여졌다는 것이 여태까지 외부에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그의 ‘30년 대운’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었을까. 김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미국 GM본사와의 합작이 무산되고, 또 IMF체제하에 있던 채권단이 대출금 상환 연장을 거부하면서 결국 ‘김우중 호’는 서서히 침몰하고 말았다. 지난 99년 6월이었다.

끝내 ‘실패한 경영자’ 낙인

대우그룹이 남긴 것은 68조2,0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뿐이었다. 김 전 회장은 같은해 9월 마지막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길로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않았다. 무기한 방랑생활에 들어간 것이다. 한 때 재계 서열 2위그룹의 총수였던 그는 더 이상 ‘샐러리맨의 우상’이 아니었다. 회사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지 않은 채, 국제 수사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 그가 5년 8개월만인 지난 15일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다. 몇몇 대우 관계자들은 그를 반겼지만, 정작 오랜만에 돌아온 그에게 남겨진 것은 싸늘한 법의 심판대 뿐이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재벌 총수가 되기까지 무려 30여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경영 실패자로 추락하기까지는 채 1년도 걸리지 않은 셈이다.

# 김우중, 귀국에서 구속까지 33시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지난 15일 오전 5시30분 공항에서 곧장 대검찰청으로 이송됐다. 이후 지난 16일 오후 2시, 서울지방법원은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영장을 전담한 김재협 판사는 “김 전 회장이 도주할 위험과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여전히 있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김 전 회장은 고국땅을 밟은 지 33시간 만에 구속영장을 발부받게 됐다. 김 전 회장의 혐의는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그룹 계열사를 동원한 41조원대의 분식회계와 10조원의 사기대출, 25조원의 외화밀반출 혐의다.

김 전 회장은 조사 첫날인 지난 15일 분식회계와 사기대출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외화밀반출 혐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환거래법을 위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돈을 개인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 재계에서는 그가 이 혐의를 강력히 부인하는 것과 관련해 “그룹의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은 지겠으나, 회사 돈을 개인이 빼돌렸다는 개인의 명예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진실 여부를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느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김 전 회장은 구속영장이 발부된 지 약 5시간 만에 구속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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