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내가 오래 살다 보니 못 볼 것을 다 보는구나. 홍 시중은 10년 전 나를 도와 동지공거를 맡아 자네를 포함한 33인을 뽑지 않았던가……. 그는 저녁마다 목욕을 하고 의관을 갖추어 북두칠성에 절하였는데, 비록 조빙(朝聘, 신하가 조정에 나가 임금을 만나는 것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내는 일)이나 행역(行役, 공무로 먼 곳에 나아감)이 위급할 때라도 일찍이 그만두지 않았으며, 홍건적의 침입에 몽진하자는 여러 중신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개경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던 강단 있는 인물이었는데…….

11월 초순. 개경 환도 후에 공민왕은 모두 275명에 대해 공신 책봉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들 중 문신은 12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무신이었다. 이 275명에는 김용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신들을 위한 공신 책봉으로 최영은 진충분의좌명공신이 되었고, 뒤이어 판밀직사사, 평리를 거쳐 찬성사에 올랐다. 또한 전란 중 개경을 수복할 때 참가한 이성계의 존재도 점차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해(1363, 공민왕12) 연말. 전란은 종결되었지만, 또 다른 걱정이 이제현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신흥 무인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되면 공민왕 초기에 어렵게 복구했던 문신 중용정책이 점차 퇴조하게 될 것이다. 미구에 이들 신흥 무인 세력과 사대부 집단, 그리고 기존 권문세족 간의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걱정을 안고 있었지만 당장의 해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제현은 본연의 저술활동에만 전념하여 셋째 아들 이창로와 손자 이보림을 통해 시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를 간행했다. 모두 1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와 문, 역대 왕들의 사찬(史贊)과 주요 기사, 습유(拾遺, 빠진 글을 뒤에 깁고 더함), 묘지, 연보 등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권4에 있는 소악부는 고려 백성들이 부르던 가요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제현은 이 책에서 무신 정권이 끼친 해악을 극복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고 키워 나가는 일을 고민하는 한편, 고려 문학을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논하고 새로운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고된 부역과 가렴잡세, 권력자들의 약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를 <사리화>라는 한시로 기록했다. 

黃雀何方來去飛(황작하방내거비) 못된 참새는 어디서 날아왔는고              
一年農事不曾知(일년농사불증지) 한해 농사가 아랑곳없구나.                   
鰥翁獨自耕芸了(환옹독자경운료) 늙은 홀아비가 혼자 갈고 맨 밭인데          
耗盡田中禾黍爲(모진전중화서위) 벼와 수수를 다 까먹어 없애다니.  
         

이제현은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노래를 기록하여 역사에 보존케 해서 애민사상을 고취시키고 후세의 경계로 삼고자 했다. 또한 그는 효자 64명의 전기를 모아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해 《효행록》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호복을 입은 인물 다섯이 말을 타고 얼어붙은 겨울 강을 건너는 모습의《기마도강도》를 그렸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여기화(餘技畵, 사대부들이 여가를 이용하여 그린 그림)이다.
공민왕의 폐위, 그리고 복위

이야기는 다시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황후는 공민왕에 대해 절치부심(切齒腐心) 원한을 품고 있었다. 6년 전에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하면서 자신의 오빠인 기철과 노책·권겸 등을 죽였기 때문이다. 때마침 원나라 제1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제2황후인 기황후가 정실 황후에 봉해졌다. 이제 기황후의 뜻을 거스를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었다. 
오빠의 원수를 갚을 날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던 기황후는 20세 임풍옥수(臨風玉樹, 잘 생긴 사람)의 헌헌장부가 된 태자를 불렀다. 
“태자야! 6년 전 공민왕이 네 외삼촌을 죽인 것을 기억하고 있느냐?”
“예, 똑똑히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이제 네가 이렇게 장성했으니 꼭 외가의 원수를 갚아다오!”

“어마마마, 소자가 기필코 외가의 원수를 갚아서 어마마마의 한을 풀어드리겠나이다.”
“그래, 공민왕을 죽여 버리고, 고려왕을 우리 기씨 가문으로 봉하자꾸나!”
“소자가 황상께 주청 드리겠나이다.”

최유(崔濡)는 충혜왕 복위 3년에 군부판서로서 조적의 난에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공민왕 때 아우 최원을 데리고 원나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최유는 환관 박불화에게 뇌물을 써서 어사 벼슬을 얻은 후 기황후에게 접근했다. 최유는 기황후가 거처하는 수녕전으로 안내되었다.
“어사 최유, 현신(現身)이오.”
찬란한 누대(樓臺) 위의 안석에 체구가 아담한 미인이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요염한 자태, 찬 서리 같은 기품을 가진 여인은 최유를 압도하고 있었다. 누대 밑으로 다가간 최유는 부복했다.
“어사 최유, 황후마마께 삼가 문후인사 올립니다.”
그러자 또렷하고 낭랑한 기황후의 음성이 누전(樓前)에 울렸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황후마마, 공민왕은 황후마마의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입니다. 그를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 왕혜(王)를 고려 국왕에 세우소서.”
덕흥군은 충선왕의 셋째 아들로 공민왕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된다. 일찍이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가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 건너가 순제에게 아첨하여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어사는 참으로 자신이 있는가?”
“그러하옵니다. 황후마마. 덕흥군을 고려왕에 봉하시면 고려에서는 공민왕에 불만을 품고 있는 김용이 이에 적극 내응할 것이옵니다.”
이처럼 최유는 고려에 앙심을 품고 있던 중 오빠의 원한을 갚기 위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기황후의 뜻을 알고 그녀를 충동질했다. 바야흐로 거사는 무르익고 있었다. 최유는 기황후와 짜고 원나라 순제에게 거짓 보고를 하였다.
“고려는 홍건적의 침입 때 국인을 잃어버려 자체적으로 만든 국인(國印)을 사용하고 있사옵니다.”
1362년 12월 2일. 이에 원나라 순제는 공민왕을 폐위하는 교지를 내렸다.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국왕에 임명한다. 기삼보노(기황후의 조카)를 원자로 삼고 김용을 판삼사사, 최유를 좌정승에 임명한다. 원에 있는 고려인은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거라.’

폐위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망연자실했다. 자신이 보위에 오른 후 가장 큰 정치적 시련이었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공민왕의 폐위 결정 소식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전례 없는 폐위 결정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구동성으로 공민왕에게 상주했다.
“전하, 나라가 어려울 때일수록 조정 원로들의 경륜과 방책을 들어야 하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익재 대감은 조정이 어려울 때 연경에 가서 충선왕과 충혜왕의 무고함을 밝히고 위기에서 구해준 혜안이 있사옵니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그런 익재 대감을 충신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익재 대감의 말 한마디는 천금의 무게와 권위를 지니고 있사옵니다.”

이에 공민왕은 허둥지둥 급히 이제현을 궁궐로 불렀다.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편전으로 들어오는 이제현의 모습은 마치 신선과 같았다.
마음이 다급한 공민왕은 이제현을 반기면서 인사했다.
“장인어른, 어서 오세요.”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장인어른, 기황후가 과인에게 자신의 오라비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누란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현은 한동안 고개를 숙여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전하, 소신의 생각으로는 먼저 전하를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국왕에 임명한 원 순제의 결정이 부당함을 알리시고, 폐립조치의 취소를 간청하는 사절단을 한 두 차례 원나라에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기황후가 사절단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을까요?”
“사절단이 오라버니를 잃은 원한에 사무쳐있는 기황후를 설득하지는 못할 것이나, 고려 조정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옵니다.”
“사절단 파견의 후속 대책은 없습니까?”
“교서를 내려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안심시키고, 덕흥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는 인물들을 척결하고, 덕흥군 추종자들과 파사부에 격문을 보내 회유 경고하는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마지막으로 군신회의를 열어 군대를 증모(增募)하는 등 덕흥군의 침입에 대한 방비태세를 세우는 것이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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