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1969년 식량 부족 사태 당시 일본과 미곡 교섭 했다”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공로명 전 장관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마구간 허물로 조립식 건물로 숙소 만들어 사용
“정무과 빼고는 주일대사관 각 과를 두루 순방했다”

- 우리 외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의 하나로서 1962년 말에 대한민국 최초의 브라질 농업 이민이 시작됐다고 들었다. 장관님께서 당시 주미대사관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말씀해 달라.

▲ 제가 직접 이민과 관련해서 한 일은 없고, 다만 당시 주미대사가 남미 여러 국가들의 대사를 겸임했다. 따라서 당연히 주미 대사관이 남미 관계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1961년 당시에 주미대사였던 정일권 대사께서 친선 사절단 단장으로 브라질을 방문했다. 그게 1961년 7월인데. 이때 자니우 쿠아드루스 브라질 대통령을 만나서 남미 이민 문제를 논의한다. 그러고 나서 그 해 12월에 신임장을 제정해서 주 브라질 대사를 겸임 하셨다. 그해 몇 군데 남미 국가에 신임장을 제정했는데, 저는 1963년 1월에 파라과이·아르헨티나·에콰도르 이 3국에 겸임대사 신임장을 제정할 때 수행을 했다. 당시에는 남미에 우리 공관이 없었다. 그래서 파라과이에 가면서 중화민국, 지금의 타이완에 연락을 했다. 타이완은 당시에 남미에 여러 공관을 두고 있었다. 파라과이에도 중국(중화민국) 대사관이 있어서, 우리가 도착을 하니까 파라과이 대사관에서 출영을 나오셨다. 그래서 중국 대사관 차를 타고 과라니 호텔에 머무르고, 또 자연히 중국 대사가 초청해준 만찬에 갔다.
만찬이 끝나고 후식으로 수박이 나왔는데, 중국 대사 설명이 일본 이민자들이 와서 농업을 하면서 재배한 수박이라는 거다. 호텔에 머무르면서 파라과이에서 커피농원을 운영하는 미국인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수도인 아순시온 주변의 땅값이 1에이커에 1달러라고 했다. 1에이커라면 우리 평수로 이야기하면 1200~1300평 가까이 되고, 4000m² 가량인데, 미국 돈 1달러라니 굉장히 싼 거다. 그래서 땅을 사라고 제게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저희가 본국에서 파라과이에 대한 농업 이민을 검토 해주면 좋겠다고 보고서를 보냈다. 그렇게 당시 주미 대사관이 남미 대사관을 겸임하면서 이민 가능성을 건의했고, 결국 정부에서 움직여서 1962년에 브라질에 17세대가 이민을 가게 되는데, 이것이 시작이다. 그래서 지금 남미에는 아시다시피 한 5만 명 가까운 우리 교민들이 살고 계신다.

- 장관님께서는 1965년 한·일 수교 이듬해인 1966년 3월부터 약 3년 동안 주일 대사관에서 총무과장·영사과장·경제과장을 지내셨다. 우선 196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재외 공관 인프라가 약 2배 정도 확충되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그 당시에 주일 대사관의 사정은 어땠는가?

▲ 사실 저는 1966 년 봄에 부임을 했다. 한·일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은 1965년 12월이다. 주일 한국 대사관이 재편되면서 제1진으로 간 것이나 마찬가진데, 사실 저는 1965년 초부터 도쿄에 장기 출장을 가 있었다. 1964년 12월에 제7차 한일회담이 시작된다. 전 당시 어업 담당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장기 출장을 갔고, 6월 22일 한·일 간 제 협정이 타결되면서 조인식을 보고 본부에 돌아왔고, 이후 다시 발령을 받아 이듬해 3월에 부임을 했다. 국교 없을 당시의 주일 대표부에서 주일 대사관으로, 외교 공관으로 탈바꿈을 한 거다. 제가 갈 때만 해도 후에 차관이 된 UN 대사 박쌍용, 그다음에 이종한·김영휘·한창식·김봉규·김경철, 다들 후에 외무부 간부가 되는 분들인데, 이런 분들과 같이 부임을 했다. 저희가 국교를 수립하고 나서 일본에 공관으로 8개 총영사관을 발족시켰다.
그 이전 대표부 시기부터 오사카·후쿠오카에는 우리 대표부 분관이 있었지만 이런 공관들이 각각 총영사관이 되고, 홋카이도의 삿포로, 그다음에 동북 지방의 센다이, 그다음에 요코하마, 고베, 시모노세키, 나고야 이렇게 총 8개의 총영사관이 개설 된다. 총영사관에서 근무할 영사 직원들도 배치되니 대일 외교가 이때부터 굉장히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저는 처음에는 총무과장으로 부임을 했다. 역시 할 일이 굉장히 많았다. 현지 고용원을 채용해야했고, 주로 재일 동포 가운데서 채용 했다. 여러 가지 노무 조건으로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을 쓰는 게 훨씬 싸니까. 그리고 우리 직원들도 현지 직원으로 고용하는 게 좋기 때문에 운전기사 분들은 본국에서 데리고 갔다. 당시 직원들의 숙소가 필요하지 않느냐. 공관 내에 특이하게 마구간이 있었다. 그것을 허물고 거기에 조립식 건물로 숙소를 만들어서 한 10여년 현지 공관원들 숙소 역할을 했었다. 이러한 일을 총무과 때 했고, 그러다가 신동원 당시 서기관이 비서관을 하다가 본국에 들어가서 동북아과장이 되기 때문에 그 후임으로 제가 대사 비서관이 됐다. 그때 김동조 대사가 주미대사로 나가시고 후임으로 엄민영 대사께서 오셨다.
엄민영 대사 밑에서 비서관을 하다가 영사과장 거쳐서 경제과장을 했다. 영사과장 할 때는 당시 영사 1과와 2과가 있었다. 영사 1과는 재일동포 문제를 다루고, 영사 2과는 비자 관련 업무를 취급하고 있었는데, 제가 교민담당 영사 1과장이었다. 교포들의 복지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당시 우리 교포들이 밀입국했던 사실이 입관, 즉 입국관리국에 적발돼서 퇴거를 당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이미 일본에서 오래 생활했고, 또 그곳에 생활기반을 가지고 가족도 있는 상황에서 퇴거를 당하니, 참 어려운 문제였다. 이런 진정들이 오면 법무성과 교섭해서 특별재류허가를 법무성에서 받는다. 합법적인 재류허가를 받도록 하는 일이다. 법무성 입국관리국 관계관들과 접촉을 하는데, 주로 법무성의 카운터파트들이 일본 검사들이다. 그런 일들을 하다가 경제과로 옮겼다.
그래서 정무과를 빼놓고는 주일대사관 각 과를 두루 순방했다. 경제과 때 기억이 남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의 상업차관이다. 특히 이 상업차관을 위해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일본에 많이 출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상업 차관에 따른 업무들을 대사관에서 도와드리고 있었다. 또 하나는 당시 1969년에 우리나라에 식량 부족 상황이 생겨서 미곡 도입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당시 일본에선 재고미가 많이 쌓여서 일본 정부가 쌀을 보관하는 데 막대한 돈을 들이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가 미곡을 차입하고 현물로 상환하는 조건의 미곡 도입 교섭을 추진했다. 말하자면, 일본은 일본대로 재고미를 처리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미곡을 수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해서 그 대금으로 정부의 경제건설자금으로 이용했다. 말하자면 전에 미국 잉여농산물 PL480의 판매대금이 대충자금이 돼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을 도왔던 것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미곡 도입으로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제가 경제과장 할 때 1차 미곡 교섭을 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