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정부예산안이 보기 드물게 제1야당을 제쳐놓고 처리되면서 여의도 정가에 여진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매년 예산을 두고 여야가 다투지만 예산 처리 절차상 제1야당을 ‘패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부예산안을 심의하는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을 제1야당에서 맡고 있고, 예산안 감액과 증액의 실질적 칼자루는 교섭단체에서 임명한 예결위 간사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을 꼽자면 7~8명 정도 됩니다. 교섭단체 원내대표 3명과 예결위원장, 교섭단체 예결위 간사 3명이 그들입니다. 예결위원장은 예산안을 심의, 의결하는 상임위를 운영하고, 예결위 간사들은 밀실에 모여 ‘예결위 소소위’를 열고 정부 예산의 삭감과 증액을 결정합니다. 원내대표는 교섭단체 간 협의를 통해 예산 심의, 의결의 과정을 최종 조율합니다.

예산 심의과정에서 이렇게 교섭단체가 가지는 권한이 크고, 특히 제1야당은 여당과 함께 예산안 통과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야당은 대폭 삭감을 요구하고, 여당은 방어하면서 줄다리기를 하다가 ‘기재부가 용인할 수 있는 선’에서 삭감하고, ‘기재부가 허락하는 선’까지 증액하는 것이 매년 국회에서 예산 심의하면서 벌어지는 풍경이었습니다. 헌법에 ‘예산 증액에 대한 동의권’이 명시되어 있어서 국회는 매년 기재부를 상대로 밀당을 하게 됩니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예산 심의를 앞두고 정부예산을 ‘슈퍼 예산’이라고 규정하면서 “최대 14조 원을 삭감하겠다”고 했을 때까지도 정치권에서는 늘 하는 말이려니 하고 지나갔습니다. 느닷없이 황교안 대표가 청와대 앞 단식에 들어가면서 예산 심의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국회 밖으로 나가 청와대로 달려갔고, 예결위는 문을 닫았습니다. 보통 이렇게 되면 예산 심의는 야당이 복귀할 때까지 중단되게 됩니다.

자유한국당은 두 가지를 오판했습니다. 우선 국회 지형이 예전과 달랐습니다. 지금은 자유한국당이 없어도 국회 본회의를 열 수 있는 의결정족수를 채울 수 있는 상황입니다. 국회에는 자유한국당 말고도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 대안신당과 무소속 의원들이 있고 이들의 의석수가 160석이 넘습니다. 또 자유한국당은 여당의 예산안과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 의지를 너무 가볍게 봤습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를 너무 쉽게 봤다가 제대로 당했습니다.

연말만 되면 국회가 정부 예산을 쥐고 흔드는 것 같지만 다 아시는 대로 정부 예산의 ‘보이는 큰손’은 기획재정부입니다. 기재부는 정부 예산 편성에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몇 년 동안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에 반해서 끊임없이 확장 재정에 저항하며 균형 재정 또는 긴축 재정에 가까운 정부예산을 편성해 왔습니다. 기재부가 제출한 예산에서 삭감되는 액수가 기재부가 예상한 범위를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기재부의 승인 없이는 증액도 불가능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국회에서의 예산 심의는 삭감을 통해 흔히 ‘실링’이라 부르는 ‘증액 한도’를 만들고 기재부와 협상을 거쳐 한도 내에서 증액 항목을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여야 협상에 나서는 교섭단체의 원내대표나 예결위원장, 간사들이 힘을 발휘합니다. 이번에는 자유한국당이 국회 밖으로 나가면서 본의 아니게 ‘4+1협의체’에 힘을 실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 덕에 박지원, 황주홍, 조배숙과 같은 비교섭단체의 실세 의원들이 혜택을 봤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국회의원들이 예산 심의 과정에서 ‘쪽지 예산’에 매달리는 이유는 예산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정활동 성과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산을 확보했다는 사실이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우리 유권자들은 후보 개인에 대한 선호보다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인물 됨됨이를 볼 때도 후보자의 이력으로 판단합니다. 쪽지 예산 성과가 크다는 의원들이 차기 총선에서 얼마나 귀환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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