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DMZ 국외자료 수집사업' 최종보고회 오는 18일 개최
파주 DMZ에서 처음으로 Y자형 철책을 건설하는 영상 등이 보고회를 통해 최초로 공개될 예정

[일요서울|파주 강동기 기자] 파주시는 오는 12월 18일 오후 3시 파주시청 대회의실에서 ‘파주 DMZ 국외자료 수집사업’ 최종보고회를 개최한다.

파주시 중앙도서관은 지난 6월부터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 일대의 다양한 냉전문화유산을 평화유산으로 전환하고자 국외자료 수집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최종보고회에서 자료 조사의 성과를 공개하고 이를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용역을 수행하는 성공회대 냉전평화연구센터는 파주 DMZ 관련 1만여 장의 문서와 사진, 70개 릴의 동영상을 발굴·수집 중이다.

그 가운데 옛 임진나루 진서문이 소실되기 전 모습, 초기 임진강 다리의 건설, 1960년대 판문점 시설의 확장, 1967년 10월 파주 DMZ에서 처음으로 Y자형 철책을 건설하는 영상 등이 보고회를 통해 최초로 공개될 예정이다.

또한, 파주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두 주체인 미군과 파주 지역사회의 관계를 알 수 있는 한미친선협의회 회의록을 최초로 발굴해 공개한다.

성공회대 냉전평화연구센터장 강성현 교수는 “평화는 남·북 정부 간 상호협력과 국제기구의 중재로만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DMZ 접경지역 지자체와 주민들이 함께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상호협력을 할 때 평화가 더 두텁게 현실이 된다”며 “이번 조사사업은 지자체에서 주도하는 DMZ 접경 지역에 관한 최초의 광범위한 조사사업이다”라고 전했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이번 조사 사업을 시작으로 파주 DMZ 내 분단과 냉전의 문화유산을 탈분단 평화자원으로 전환시켜 녹색평화, 생태경제가 어우러진 평화도시 파주로 만들 것”이라며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전시, 출판, 대중강연 등 다양한 시민 이용 플랫폼을 통해 현대 파주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이해와 평화, 녹색의 가치를 확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파주시는 이번에 수집된 자료들이 남·북과 북·미 정상회담의 평화 기조에 부합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온 국민의 염원에 맞도록 전시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파주 DMZ 국외자료 수집사업' 최종보고회를 통해 최초로 공개될 예정인 새로운 자료를 사진으로 미리 만나본다

- 다리가 만들어지다.임진강과 다리

1958년 문산지도에 임진강 다리 위치 표시(편집 미국방성지도제작국, 제도 대한민국 육군지도창, 1958년 제작)
1958년 문산지도에 임진강 다리 위치 표시(편집 미국방성지도제작국, 제도 대한민국 육군지도창, 1958년 제작)

▲1950년 12월과 1951년 1월 두 차례 걸쳐 임진강 일대와 금촌, 문산 등지에 미군 폭격으로 교량 및 시가지가 큰 피해를 입었다. 폭격이 지나간 1951년 3월 30일, 미군이 촬영한 영상에는 완전히 파괴되기 전의 임진진(진서문) 모습이 남아 있다.

강을 건너온 나룻배가 임진나루에 닿고 나서 진서문 아래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는 인민군 병사들이 보일 때 그 뒤로 성벽과 부속 건물이 보인다. 원래 나루가 쓰이던 방식의 뱃길은 아니지만 전쟁은 옛길 위에 새길을 놓아 강 건너로 포로를 옮겼던 것이다.

‘기러기’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다리가 생기던 1951~53년 사이 임진강에는 모두 11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중에 전쟁이 끊어놓은 자유의 다리(임진강철교), 전쟁 기간에 사용된 기러기(Honker) 다리, 전쟁 후에도 살아남은 저어새(Spoonbill) 다리, X-Ray(Libby) 다리, 홍머리오리(Widgeon) 다리, 쇠오리(Teal) 다리는 오늘날 파주를 만들어온 ‘길’이 되었다.

- 정전의 갈림길에서, 기러기 다리와 자유의 다리

쇠오리 다리(Teal Bridge)가 완공된 후 1953년 7월 15~16일 첫 홍수가 지나간 다음의 모습.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쇠오리 다리(Teal Bridge)가 완공된 후 1953년 7월 15~16일 첫 홍수가 지나간 다음의 모습.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51년 6월, 전쟁이 발발한 지 일 년이 되어갈 무렵 전선은 고착화되기 시작해 유엔군과 공산군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지루한 공방전을 펼쳤다.

당시 미군 자료를 보면 1951년 6월 21∼22일 문산읍 임진리(임진진 터)와 진동면 동파리를 연결하는 부교 공사 기록이 있다. 이 다리는 국군 1사단 탱크 부대가 개성 부근의 인민군 탱크 부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전쟁 발발 1년째인 6월 25일에 다리가 철거된다.

그 뒤 개성 내봉장에서 최초의 정전협상이 개최되기 전 미군 1169공병대는 정전협상에 맞추어 동일한 길이의 좀 더 보강된 다리를 건설한다. 군사용 가교가 철거되고 정전협상 대표단과 기자단이 사용할 다리가 건설된 것이다. 7월 11일 미군이 촬영한 영상에는 리지웨이 사령관이 대표단을 환송하는 모습과 15일 개성 내봉장에서 회담을 마친 차량이 기러기 다리를 건너 사령부로 돌아오는 장면이 담겨 있다.

정전협상 대표단은 선유리의 사과밭에 마련한 유엔군임시사령부를 출발해 기러기 다리를 건너 개성 내봉장을 오가며 협상을 계속 진행했다. 기자단도 이들과 동행했는데 임진강 남쪽에 있는 문산역까지 전용열차를 타고 도착한 로이터통신, 뉴욕타임스 등 기자들은 지프차에 올라 기러기 다리로 임진강을 오가며 대표단과 동행했다.

그런데 1951년 8월 여름에 발생한 임진강 홍수에 유실된 것이다. 당시를 촬영한 사진과 영상을 보면 임진강 홍수의 위력과 파괴된 다리의 잔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임진강에 놓인 다리 중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는 것은 임진강철교, 즉 자유의 다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주와 개성을 이어주던 이 다리는 폭파되어 철교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1950년 11월에 한 차례 수리되지만 이후 다시 파손되어 1952년 2월 미84건설공병대대가 상행선을 복구했고 정전협상 대표단은 나룻배와 헬기 대신 자유의 다리를 이용해 회담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 물살을 ‘정복’하다 : X-Ray 다리와 쇠오리 다리

완공된 X-Ray(Libby) 다리(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완공된 X-Ray(Libby) 다리(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유엔군의 서부전선 주저항선을 따라 구불구불 흐르는 임진강은 최전방부대와 보급부대 사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평소 임진강은 다른 강과 비슷해 보이지만 장마가 시작되는 여름철에는 급류가 형성되고 얼음이 어는 겨울철에는 유빙이 교각을 파괴한다. 때문에 임진강 도강(渡江)은 군작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며 상시통행 가능한 다리 건설은 공병부대의 최우선 목표 중 하나였다.

1952년 여름 임진강에는 총 5개의 상로교(지표보다 높은 위치에 건설된 다리)와 1개의 하로교(지표와 가까이 건설된 다리), 여러 개의 부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1군단 지역에서 임진강철교를 제외한 다리는 대부분 나무로 지어져 여름철 홍수와 겨울철 결빙으로 통행이 제한되었고 홍머리오리(Widgeon) 다리는 홍수에 무너지지 않는 대신 높이가 낮아 물에 쉽게 잠겨버렸다.

임진강의 위협에 대해 완전히 인식하고 있던 군단사령부는 각 부대별로 하천 수위와 결빙에 대해 신속히 대응하라는 책임을 부여하는 한편 교량을 보호하기 위한 잔해물 제거용 폭탄과 보트, 야간 탐조등 등을 준비하게 했다. 하지만 1952년 여름의 기록적인 홍수는 이러한 준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7월 27일에 내린 비는 홍머리오리 다리를 조금 넘치는 정도였지만 28일에는 극심한 폭우로 바뀌어 쇠오리 다리와 X-Ray 다리의 교각을 파괴했다. 8월 24일 다시 한 번 찾아온 폭우는 홍머리오리 다리를 완전히 파괴했고 X-Ray 다리를 또 한 번 타격했다.

1군단 사령관은 파괴된 다리를 복구하기보다는 실용적인 교량을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북진을 하든 휴전을 하든 자유의 다리는 철도 교통량이 제한되므로 문산리와 개성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있어야 했다.

미8군공병대가 임진강 홍수를 견딜 수 있는 교량의 설계 및 건설을 위한 광범위한 연구를 실시했고, 제2건설공병대는 미8군에서 제공한 기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체 연구를 통해 적합한 다리 설계를 진행했다.

그리고 ‘임진강의 정복자’(The Conquerors of the Imjin)라고 불린 미84건설공병대대는 완전히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떠내려간 다리를 평범한 구조물로 대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콘크리트 교각 아래로 늘어진 기반암에 단단히 고정된 다리만이 임진강의 극심한 홍수와 결빙을 견디고 일 년 내내 활용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X-Ray 다리는 미국 모든 주의 고속도로 시스템에 도입할 만큼 뛰어난 기술력과 완성도를 자랑했고, 쇠오리 다리는 홍수에도 파손되지 않게 설계된 실험적인 다리였다. 953년 7월 15~16일 찾아온 홍수로 첫 시험에 오른 두 다리는 큰 파손 없이 무사히 임무를 수행해냈다.

- 붙여진 두 개의 이름, 군사작전과 임진강 철새

1962년에 촬영한 자유의 다리. 검문소 표지판에 ‘모든 한국인은 도민증을 제시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62년에 촬영한 자유의 다리. 검문소 표지판에 ‘모든 한국인은 도민증을 제시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다리는 때로 굳건한 장벽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처럼 전쟁 상태와 유사한 정전이 계속되는 나라에서 접경지역의 다리는 제2의 철책이 된다. 다리가 파괴되어 언제든지 적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일상에서 사람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군 작전지역(임진강의 철새)에서 이름을 딴 임진강 다리들은 주로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면서 정전 이후에도 민간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지금도 다리를 통행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요건을 갖춰야 하며 그러한 출입도 제한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임진강 유역의 비무장지대가 그 안에 수많은 지뢰를 품고 있듯이 다리의 한편에 드리운 전쟁의 그림자가 평범한 이들의 일상마저 통제하는 것이다.

자유의 다리는 포로가 송환된 후로 정전협상 대표단이 주로 이용했다. 저어새 다리와 X-Ray 다리는 각각 전진교와 북진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군사 용도로 사용됐다. 명명(naming)은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그에 따른 효과를 유발한다. 그런 점에서, 다리에 대한 이러한 이름‘들’은 하나의 다리를 바라보는 여러 기억과 욕망들을 가늠하게 한다. 누군가는 새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작전지역으로, 또 누군가는 어떤 열망으로 이 다리들을 부를 것이다.

- 마을로 간 한미동맹의 명암 : 한미친선협의회

보이스카웃 활동 사진. 1964년 12월 19일 파주시 금촌의 보이스카우트 제31단 이근형 단장과 단원들이 캠프 하우즈의 제1기병사단 본부중대를 찾았다.(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보이스카웃 활동 사진. 1964년 12월 19일 파주시 금촌의 보이스카우트 제31단 이근형 단장과 단원들이 캠프 하우즈의 제1기병사단 본부중대를 찾았다.(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군의 대민사업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대민사업은 민사사업(Civil Affairs)이라는 이름으로 각 사령부의 G5에서 주로 담당해 왔고 한미친선협의회를 비롯한 다양한 대민사업에 대한 기록을 정리했다. 1960년대에 파주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의 분기별 보고서에서 미군사원조(AFAK)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역 및 한미친선협의회의 회의록을 발굴했다.

이 시기 G5의 주요 활동은 대한군사원조 프로그램인 미군사원조를 관리하는 것과 비군사적 부수활동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미군사원조 프로그램은 크게 건설 분야와 비건설 분야로 나뉘는데, G5는 비건설 분야의 원조 프로그램을 관리했다. 구제 프로그램은 1965년 1분기의 경우, 12,348.95달러의 규모였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재난 희생자들에게 주어졌다. 미군사원조의 기부 프로그램은 1965년 1분기의 경우 20,042.87달러 규모였으며, 1기병사단 군인들 및 미 본토 지역사회의 기부로 마련됐다.

이 가운데 11,718.11달러는 현금이었으며, 8,324.76달러는 물품으로 기부되었다. 이 기부는 공중건강, 공중복지, 교육 및 종교 등 4분야에 사용되었다. 공중건강 분야의 활동은 관내에 존재하는 12개의 고아원에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대략 800여 명의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또한 공중복지 분야에서는 주로 이재민 구호품이 파주군에 전달되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554.60달러 규모의 물품과 서비스가 전달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미군 장교들은 관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나가서 영어교육을 진행했다. 종교 분야의 지원활동을 통해 관내의 여러 교회에 약 508.25달러의 구호품이 전달되었다.

비군사적 부수활동은 다수의 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작은 규모의 활동들을 의미한다. 백양나무를 심거나 라디오 스피커를 전달하고, 그네와 시소 등의 기구들을 마련해서 기부하는 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미군은 어린이들이 다니는 길에 안전벽을 설치하고, 축구 리그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내의 30개 초등학교에 유니폼, 양말, 축구공 등을 전달하기도 했다. 제1기병사단 G5 1965년 1분기 분기보고서에는 부수활동의 종류와 예산 규모가 정리되어 있다.

미군의 대민사업은 다리나 도로와 같은 기반시설과 병원, 학교, 고아원과 같은 공공시설에 대한 지원에 그치지 않았다. 안전, 위생, 건강, 복지,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지역의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미친선’ 혹은 ‘한미동맹’의 가치를 지니고 미군기지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양성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용했던 것이다.

마을과 도시 수준에서 진행된 미군의 대민사업들은 동맹에 우호적인 마을과 사회, 즉 ‘동맹마을’과 ‘동맹사회’를 형성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회의록을 통해서 본 한미친선협의회의 구성과 활동

▲미군의 대민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지만, 지역사회를 대화의 파트너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1962년에 잇따라 발생했던 심각한 미군범죄 사건들로 인해 미군기지 주변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제1기병사단 관내에는 7개의 한미친선협의회(Community Relations Advisory Council: CRAC)가 조직되어 정기적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파주린치사건’ 직후인 1962년 7월부터 다음 해 초까지 주한미군의 각급 부대와 파주 주둔 미군에게는 한미친선협의회의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파주군과 제1기병사단 간의 한미친선협의회는 한 달에 한번 개최되었다. 관내의 부대와 면 단위의 한미친선협의회 역시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또한 한미친선협의회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의장단 회의도 열렸는데, 1964년의 회의는 12월 13일 캠프 하우즈에서 개최되었다.

한미친선협의회에는 누가 참석했을까? 미 제1기병사단과 파주군 사이에서 열린 파주군-한미친선협의회에 미국측에서는 1기병사단의 사단장을 비롯한 주요 장교들이 참석했고, 파주군측에서는 군수와 지서장을 비롯한 지역내 주요 관료와 유력인사들이 참여했다.

파주군 내의 면이나 리 단위의 여러 마을을 대상으로 한 한미친선협의회에는 1기병사단 예하의 각급 부대의 부대장과 장교들이 참석했다. 예컨대, 1965년 3월 1일 캠프 패터슨에서 열린 미 제1기병사단 제8공병대대와 광탄면 사이의 한미친선협의회에 참석한 인물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1965년 3월 18일, 미 제1기병사단 포병사령부 장교식당에서 개최된 천현면 한미친선협의회 회의록(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1965년 3월 18일, 미 제1기병사단 포병사령부 장교식당에서 개최된 천현면 한미친선협의회 회의록(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7사단 포병대 사령관인 Hames W. Love 대령을 비롯해 제8공병대 부대장인 Richard M. Wells 소령, 제44병원장인 Johnson 소령, 광탄면장 박웅병 면장, 광탄면 지서장 최용현 경사, 광탄중학교 김태민 교장, 신산국민학교 전덕영 교장, 신산국민학교 사친회 이수영 회장, 제8공병대 통역관 이근영 등이다.

하지만 회의 참석자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취재를 위해서 신문기자가 참석하기도 하고, 성매매여성을 대표한 대표자가 참석하기도 했다.

특히 면 단위의 한미친선협의회에는 각 지역 학교의 교장들과 병원장들이 참석했는데, 이들은 미군들이 벌이는 대민사업의 혜택을 크게 받는 주체이기도 했고 미군원조 프로그램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미군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당사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만나서 무엇을 논의했을까? 한국측 참석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AFAK를 비롯한 미군 원조사업들의 진행과 관련한 정보를 미군측으로부터 듣는 것이었다.

미군측의 관심사는 크게 보면 세 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AFAK의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해서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미군의 성병 관리를 위해서 미군기지 주변 클럽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던 여성들에 대한 통제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매 회의마다 한국측에서는 이에 대한 자료를 미국측에 제공했는데, 예컨대 1965년 1월 28일 주내면 한미친선협의회에 참석했던 김갑수 면장은 1월에 “성병 환자가 4명으로 줄었고, 금주는 한 사람의 성병 환자도 없다”는 내용을 미군측에 전달했다.

세 번째 관심사는 미군기지 주변에서 벌어지는 절도 등 사건·사고에 대한 정보교환과 재발방지책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위 회의에서 맥거븐 중령은 지난 훈련 때 약 10마일의 전화선을 도난당했다는 점을 전달하고, 한국 경찰측의 협조를 요청했다.

회의의 의제가 항상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그때 양측에서 협력을 구할만한 여러 사안들이 의제에 올랐다. 가령, 김갑수 면장은 파주리에서는 밤 12시 이후에는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발전기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 맥가븐 중령은 “우리도 발전기가 모자라며 현재 1대 있는 것도 좋은 기능을 발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도와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또 맥가븐 중령은 “상인들이나 윤락여성들이 우리 부하들에게 외상을 주기도 하고 돈을 빌려주는데 대하여 골치아픈 문제라고 하겠는데요, 우리에게 와서 돈을 받아달라고 옵니다”라며 힘든 상황을 전달하자, 김갑수 면장은 “이분들에게 앞으로 외상이나 돈을 빌려주지 않도록 경고하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처럼 한미친선협의회는 미군과 지역사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협력을 관리하고 제도화하기 위한 틀로서 고안되었고, 1966년에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보다 공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파주는 한국전쟁시기부터 오랫동안 미군기지와 함께 공존하면서, 미군으로부터 큰 규모의 기반시설 투자, 물자 지원, 프로그램과 인력지원을 받아 왔다.

이러한 투자와 지원을 통해 현대 파주 탄생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상호적이기보다는 일방적이었고, 한쪽에서 한미친선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사업들은 진행되는 가운데 다른 쪽에서는 심각한 미군범죄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마을로 간 한미동맹’의 명암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군기지와 지역사회의 관계는 1970년대 초반의 미군기지 재편과 남북한의 체제경쟁 속에서 다시 한번 격동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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