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고려 조정은 이제현의 원모심려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두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급히 원나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2월 20일. 사절단 일원으로 뽑힌 이공수(李公遂)가 출국 인사차 이제현의 집을 찾아 앞날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
“어르신, 연경에 있는 고려인들은 공민왕에게 붙어야 할지 덕흥군에게 붙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사옵니다.”
“그럴테지.”
“그들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는데, 원나라가 아무리 망조가 들고 공민왕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순제가 임명한 덕흥군이 결국 고려왕에 등극할 것’이라는 대세를 따르게 될 것이옵니다.”
“늘 그러한 대세론이 문제일세.”
“기황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연경으로 간 사신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 설득으로 대세론을 펴고 있사옵니다.” 
“고려의 임금이 줄서기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오늘의 정치 현실이 개탄스럽고, 관리들이 어찌 하나같이 시류에만 영합하는 것인지 안타깝네.”

“결국 김첨수, 유인우, 강지연, 황순, 안복종, 문익점, 기숙륜 등은 기황후의 뜻을 따라 덕흥군에게 줄을 섰사옵니다.” 
“형세에 줄을 선 그들은 반드시 후회하는 날을 맞을 걸세. 모름지기 선비들은 정도(正道)를 걷고 형세가 아니라 대의(大義)에 줄을 서야 하는 법인데…….”
“어르신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이제현은 장도(壯途)에 나선 후배 정승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촌(南村, 이공수의 호)은 덕흥군의 발호를 물리치고 고려 사직을 보존하기 위한 사절의 임무를 완수해 주기 바라네.”
“잘 알겠사옵니다. 어르신.”
다음날. 이공수는 진정표(陳情表)를 가지고 공민왕 복위를 위한 연경 방문길을 떠났다. 그는 연경으로 가던 중 서경(평양)에서 태조 원묘를 찾아가 맹세했다.
‘우리 임금을 복위시키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사옵니다.’ 

다음해인 1363년(공민왕12) 2월 중순. 
원나라 연경에 당도한 이공수는 순제에게 공민왕 복위의 당위성을 알리는 진정표를 올렸다.

황제폐하!
전에 원나라에 갔다가 억류된 고려 사신들을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우리 임금(공민왕)은 자체적으로 만든 국인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원나라를 도와 홍건적을 격파했사옵니다. 우리 임금을 모함하는 무리들의 참언을 듣지 마시옵소서. 우리 임금은 대원제국의 황태자(아유시리다라)와도 막역한 사이옵니다. 

한편, 기황후는 사절단으로 온 이공수를 포섭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이공수는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후 이공수는 ‘임금을 복위시키지 않으면 귀국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한 맹세와 이제현의 당부를 실현하기 위해 만권당에 머무르며 덕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 주시하였다. 
그는 마치 신라 눌지왕 때에 일본에 억류된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파견된 박제상(朴堤上)처럼, 일종의 간자(間者) 역을 자임하여 덕흥군이 거병하여 움직이려 하자 그의 동태를 상세히 기록해 밀서로 공민왕과 이제현에게 보고했다.


최유의 난, 심리전으로 제압하다

화불단행(禍不單行). 재앙은 번번이 겹쳐 온다고 했던가.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난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최영과 오인택(吳仁澤)에 의해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공민왕이 채 숨을 돌리기 전이었다. 조정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최유의 난’을 움트게 하고 있었다. 
1364년(공민왕13) 정월 초하루. 
최유는 요양행성에 있는 몽골, 한족 군사들에게 미리 논공행상을 하여 꾀었다.
“고려왕이 장수와 군사를 협박하여 서북면을 지키게 하였으나 신왕(덕흥군)이 온다는 소문을 들으면 싸우지도 않고 흩어질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고려의 재상 이하 관리들의 가산을 상으로 주겠다.”
원나라 군사들은 모두 최유의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믿고 있었다. 마침내 덕흥군을 호종한 최유는 선봉장이 되어 원나라 요양행성의 병력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였다. 원나라 군대는 몽골군대와 한인군대가 주축이 됐고, 모병한 일반군대와 원에 사절로 왔다가 덕흥군과 최유의 회유 협박으로 합세한 류인우, 강지연, 김첨수 등 고려인들로 구성되었다. 
고려군은 도지휘사 안우경(安遇慶)이 나가 원나라군과 7번 싸워 모두 물리쳤으나, 고려군의 수가 적을 뿐 아니라 구원군이 오지 않아 결국 안주(재령)로 퇴각했으며, 최유는 선주(宣州, 평북 선천)를 거점으로 남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황은 점점 공민왕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심은 이미 공민왕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공민왕은 다시 피난을 가고자 했다. 
그러나 판밀직사사 오인택(吳仁澤)과 찬성사 최영 등이 몽진을 반대하고 나섰다.
“전하, 남쪽으로 몽진 가시게 되면 개경 이북에서 누가 전하를 따르겠사옵니까?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치고 친히 적을 물리치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옵니다.”

공민왕은 몽진과 결전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이제현을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장인어른, 신하들이 모두 하나같이 몽진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습니까?”
이제현이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전하, 덕흥군의 이번 침입은 홍건적 같은 외적의 침략이 아니라 왕위쟁탈을 위한 내전(內戰)이옵니다.”
“그건 그렇지요.”
“만약 전하께서 개경을 버리신다면 신하와 백성들은 덕흥군을 국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옵니다.”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하니 이제 전하께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배수의 진을 치고 덕흥군과 일전을 불사하는 길 밖에 없사옵니다. 그 길이 아니면 순순히 왕위를 내줄 수밖에 없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군대가 과연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전하, 심약한 생각은 거두셔야 하옵니다. 홍건적의 20만 대군도 물리친 고려군입니다. 문제는 군인들의 사기입니다. 고려의 장졸들이 전하와 덕흥군을 저울질하며 최유가 이끄는 덕흥군의 군사에 제대로 대항해 싸우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군부 내에서 신망 받고 존경받는 찬성사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시옵소서. 그러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공민왕은 편전으로 나와 찬성사 최영을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道巡慰使)에 임명하면서 명했다.
“최영 장군은 급히 정예병을 이끌고 안주로 가서 적들을 물리치라!”
총지휘관 최영은 공민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물러났다.
“전하, 반드시 적을 섬멸하고 돌아오겠나이다!”


최영이 지휘를 맡자 그를 신뢰하여 조정과 민간에서 적들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 최영은 가혹한 군법으로 군대를 지휘했다. 싸움터에서 도망쳐온 군사를 만나면 곧 목을 베어 군중에게 조리돌렸다. 
이 광경을 목도한 삼사판사 우제가 반문했다.
“장군, 사졸들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최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군이 강할 때는 너그러운 덕으로 부하를 다스리는 법이오. 그러나 지금은 아군이 열세이고 군율에 위엄이 없으면 장졸(將卒)간의 도리가 점점 어려워지는 법이오. 그러니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일벌백계로 군령을 바로 세워야 하니 너무 야속하다 하지 마시오.”
최영은 동북면에서 이성계 장군이 급히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와 전투에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도지휘사 안우경(安遇慶)에 명해 거짓 투항서를 쓰도록 했다.
안우경은 비밀리에 사자를 통해 최유에게 항서(降書)를 보냈다. 최유는 말없이 사자가 올리는 글을 받아 펼쳤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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