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장 출마를 선언한 권선택 열린우리당 의원의 기세가 매섭다.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용기 있게 나서야 한다”며 아직은 미지근한 여당의 지방선거전에 불을 지피고 있다. “도전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 현안마다 ‘제 목소리’도 내고 있다. 참여정부 첫 인사비서관을 지낸 그는 1·2개각 파문과 관련, 최근 “여당 의원들이 앞장서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행동은 자제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초선의원임에도 주저하지 않고 대전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데는 이유가 있다. ‘평생을 안고 가야할 몸의 고향’, 대전이 키운 ‘행정전문가’로서 그의 쓰임새는 바로 ‘대전시장’이기 때문이다. 권선택 의원은 지난해 11월 말 여당 현역의원 가운데 처음으로 광역단체장 출마를 선언, 당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 우리당 지지도가 좀처럼 반등 기회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의 이례적 행보는 ‘용기’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1·2 개각 대통령 비판 자제하라”

“대전시장 출마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다. 당의 지지도가 낮다고 해서 출마선언을 미룬다는 것은 패배의식이나 마찬가지다. 선거는 결국 도전이며 도전자는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용기 있게 나서야 한다.” 권 의원은 출마를 저울질하는 여권 인사들을 향해 “작은 일이지만 하나의 씨앗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도전 의사를 밝히고 동참할 것”을 주문했다. 정치는 수시로 변하는 것이며, 돌파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도 두렵지 않다. 그는 “‘어렵다’는 말은 지난 17대 총선 때도 들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권 의원은 최근 1·2 개각 파문과 관련, “여당 의원들이 앞장서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행동은 자제하라”며 참여정부 초대 인사비서관으로서의 소신을 밝혀 주목을 끌었다.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것. “당·청 ‘소통부재’에 대한 문제도 있으나 지나치게 왈가왈부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장외투쟁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당까지 나서 개각문제를 확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정·청 시스템 정비를 완성해가는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가 인사정책과 관련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스스로 참여정부의 ‘인사 로드맵’을 완성시켰다는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 의원은 “과거 정권에서 횡행했던 형식적인 검증은 없다”면서 “‘코드인사’ 등 말도 많지만, ‘엉터리 인사’라는 비난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코드인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질이 부족한 정권창출의 공신들을 발탁하는 인물코드이며, 나머지 하나는 대통령의 정책방향과 일치하는 인물을 기용하는 정책코드다. 인물코드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으나, 노 대통령은 정책코드를 지향하고 있다.”

초고속 승진, 파격인사 주인공

2003년 2월 인사비서관에 발탁되기까지 권 의원은 소위 ‘잘나가는’ 공무원이었다. 77년 행정고시 ‘수석합격’, 내무부 지방기획과장, 행정과장, 지역경제심의관 등 행정부내 요직이란 요직은 두루 거쳤다. 그는 스스로를 “업무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밝힐 만큼 떳떳하다. 공직생활 내내 ‘민원’을 귀찮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권 의원은 “업무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가 윗분들의 인정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초고속 승진’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수석’이기에 부담도 컸던 게 사실이다. “지켜보는 사람들이야 좋아 보일지 모르나, 어떤 특혜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 때는 ‘수석이라는데 시원치 않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남다른 각오를 갖게 됐다.” 행정고시 수석합격, 초고속 승진 등이 30년에 가까운 공직생활의 전부가 돼버렸지만, 권 의원은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지금이야 대전시에 편입됐지만, 내가 태어난 목달동은 과거 대덕군에 속한 오지 중의 오지였다. 초등학교 시절은 ‘우물안 개구리’였고, 대전고를 졸업했음에도 대학입시에 실패했다. 그뿐인가. 행정고시에 수석합격하기 전엔 고시낙방도 경험했다.” 그는 공직생활의 성공을 젊은 날의 ‘실패’에서 찾는다. 한편, 지난 17대 국회를 되돌아보면 ‘공무원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있다고 인정한다.

국정감사든 대정부 질의든 완곡어법을 사용했다는 것. 그렇다 해도 가장으로서의 권 의원은 굳어진 공무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자식교육은 ‘방임형’이다. 권 의원의 아버지가 그의 ‘선택’에 조언자가 돼 줬듯이, 그 역시 자식의 진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부부 재산도 공동채산제다. 사회생활을 하는 부인 윤수의 여사의 생활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권 의원의 부인은 대학교 동기동창이다. 언뜻 캠퍼스 커플로 보이지만,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영문학을 전공한 윤 여사는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며 대학 강단에도 선다. “국회의원에 도전했을 때 ‘고생길이 훤하다’며 반대했으나,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다. 지금은 서로의 가야할 길을 위해 응원해주는 입장이다.”

평생 안고 가야할 몸의 고향

권 의원은 차기 대전시장에 도전장을 낸 이후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도전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걸어온 경력으로 봐도 ‘시장 몫’으로 쓰이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대전은 좋은 시점을 맞고 있다. 전략적 변화와 발전이 필요한 때다.”고시 합격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경제기획원, 재무부, 내무부를 마다하고 선택한 곳이 바로 충남도청, 그의 ‘대전 사랑’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권 의원은 “수석 합격해 어디든지 골라 갈 수 있었지만, 공직자는 일선 행정을 해봐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향인 대전에서 시작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에겐 대전이 ‘고향이기에 소중한 곳’이라는 표현도 가볍다. “평생 안고 가야할 몸의 고향으로 여기며, 아끼고 발전시켜야 할 책무를 늘 가슴에 품어 왔다. 나를 키워준 곳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 그것은 바로 ‘대전시장’이다.”특히, 3년간의 대전시 정무·행정부시장 경험은 대전시의 행정을 꿰뚫는 안목을 키워줬다. 당시 40대였던 젊은 권 의원을 부시장에 전격 발탁한 홍선기 시장은 일선 공무원들에게 “스스로를 대전시장이라고 생각하라”고 주지시켰다.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권 의원은 행정에 착오가 없는지, 직원들과의 마찰은 없는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민심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자세를 몸에 익혔다.

아쉬움 남는 중앙 정치무대
권 의원은 청와대 인사비서관에 발탁되지 않았다면, 17대 총선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한다. 대전에서 착실히 2006년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한 번의 기회는 또 다른 기회로 이어졌다. 바로 중앙 정치무대의 경험이다. 17대 국회 원년인 2004년, 권 의원은 ‘대덕연구단지 R&D특구법’을 통과시켰다. “특구법은 향후 2년간 의정활동을 연장한다 해도 가장 보람 있는 성과물이라고 자신한다.” 이 법안은 한나라당은 물론 여당 내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길지 않은 의정활동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남는다. 행정전문가로서 권 의원의 전공분야라 할 수 있는 지방자치를 완성하지 못한 데 대한 미련 때문이다.

# 권선택의 ‘대천루 프로젝트’“815m(200층) 세계최고층 복합빌딩 건설할 것”

권선택 의원은 “국가의 미래가 달린 신성장동력을 창조하는 의미를 대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대전시에 첨단과학도시 건설이 필요하다”면서 “이런 의미에서 대전시를 세계최고의 유비쿼터스 도시(U-City)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U-빌딩, U-타운, U-시티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차기 대전시장에 도전한 권 의원이 가장 주력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전이 과학기술도시 위상 제고 및 동북아 R&D 허브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대표적 상징물’이 필요하다는 것. 권 의원은 815m(200층) 세계최고층 랜드마크 유비쿼터스 복합빌딩 건설을 구상중에 있다. 바로 ‘대천루 프로젝트’다. 권 의원은 “지금까지의 대전은 자생적 성장동력을 갖추어 발전하지 못하고 1905년 경부선 개통을 비롯, 대덕밸리 등 외부의 힘에 의존해 발전해 왔다”면서 “이제는 대전 스스로 내부 동력을 가지고 대전의 국토균형발전의 중심축으로서 ‘새판짜기’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천루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수평 거주공간을 수직 거주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거듭 “대전에 세계적인 랜드마크가 필요하다”는 권 의원은 “대덕 R&D특구의 기술력을 알리는 박람회장으로도 활용가능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 참여정부 첫 인사비서관 10개월의 추억

“애초 대통령비서실 인사보좌관실 인사비서관은 다른 사람이 내정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참여정부 첫인사비서관에 전격 발탁됐음에도, 권선택 의원이 어리둥절했던 이유다. 행정자치부 자치행정국 국장이었던 권 의원이 임명된 데에는, 당시 정찬용 인사수석의 고민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권 의원에 따르면 정 전수석은 “인사비서관 만큼은 공무원을 기용해야 한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인사’역시 집행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람을 모르고 정부운영을 모르면 안 된다는 것. 대화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조정’ 능력도 조건이었다. 결국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권 의원이 최종 결정됐다. 우여곡절 끝에 청와대 인사보좌관실로 출근했으나, 권 의원에겐 낯설었던 풍경이 많았다. 당시 청와대 비서진은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 구성원으로 진용이 짜여졌다.

유일한 공무원 출신으로 남모를 마음고생도 겪었다는 권 의원. ‘형’으로 통하는 그들만의(?) 문화에 익숙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충은 또 있었다. 만나자는 사람들의 전화였다. 특히 개각을 앞두고 걸려 오는 전화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 있는 개각만이 아니었다. 한달에도 20~30명을 선발해야 했다, 최종 인선까지 거쳐야할 검증단계도 많다. 점검사항을 책상에 붙여 놓고 일일이 확인해야 했을 정도. 그럼에도 놓치는 게 꼭 있었다. 한 번은 차관급 인사와 관련해 한 단계를 거치지 않아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했다. 권 의원은 10개월 인사비서관 시절의 추억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인사보좌관실 비서진의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 권 의원은 “교체 대상자에게 전화 통보하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결국 ‘사표 내라’는 것인데,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