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뉴시스>

영어 표현 중에 ‘the benefit of the doubt’이라는 게 있다. 법정 드라마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으로,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피고를 유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주는 혜택’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무죄 추정의 원칙’이다. 그래서 ‘give the benefit of the doubt’라고 하면, ‘일단은 상대를 믿어주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유죄로 판결되기 전까지는 믿어주겠다는 말이다.

1972년 6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돼 체포됐다.

워터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으로 닉슨정권의 선거방해는 물론이고 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결국 1974년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닉슨은 이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도청사건과 자신을 포함한 백악관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대통령보좌관 등이 관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닉슨도 무마 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됐다. 미국 국민의 닉슨에 대한 불신은 하늘을 찔렀다. 탄핵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지고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 탄핵 결의가 가결되자 닉슨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닉슨이 자신은 사건과 관계없다고 했을 때 미국 국민은 의심은 가지만 일단은 그를 믿어줬다. ‘무죄 추정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미국 국민의 믿음은 약해졌다. 급기야 워터게이트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음이 드러나자 미국 국민은 폭발했다. 닉슨이 저지른 비리보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미국 국민은 더 분노했다.

미국 국민은 닉슨이 사임한 후 세계의 대통령인 자국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극한 수치심을 가졌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닉슨을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닉슨이 자신의 비리를 솔직하게 시인하고 물러났더라면 거짓말을 한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낙인은 찍히지 않았을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민주당의 탄핵 공세에 시달렸다. 러시아가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고 여기에 트럼프가 연루됐다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살아있는 막강 권력을 앞세워 자신에 대한 탄핵 시도를 막았다. 민주당은 트럼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러시아 스캔들’은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결론나고 말았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트럼프가 또 탄핵 위기에 봉착했다.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이다. 야당 1위 주자인 바이든에 타격을 주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그의 비리 혐의를 조사해달라고 요청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민주당은 외국 정부가 미국 대선에 개입하도록 부추겼다는 이유로 트럼프를 몰아붙이고 있다.

미국 국민은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일단은 트럼프 대통령을 믿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지자 탄핵 찬성 여론이 반대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아 완전 탄핵 여부가 불투명하긴 하지만, 트럼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미국 국민의 시선이 여론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지도자의 핵심가치 중 신(信)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제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룩했다고 해도 거짓말을 하는 지도자는 결코 신뢰받지 못한다.

어디 미국만 그렇겠는가.

우리나라에서도 비리보다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영어의 몸이 된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다. 2019년에도 우리나라에서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기승전 ‘거짓말’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다.

2020년에는 ‘정치인의 거짓말은 무죄’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더이상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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