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 외화보유고 18억…그 중 5억 배상 받았다”

6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서울 톨게이트 인근 경부고속도로에서 양방향 차량이 증가하고 있다. 2019.02.06. [뉴시스]
경부고속도로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소 건설에 자금 투입
“그 돈 적절히 사용했기에 제2·3차 경제계획 순조로워”

▲ 한일회담 때 청구권자금의 액수가 적어서 정부가 국민의 비판을 받고, 여러 가지 저항도 있었지만, 결국은 최종 타결될 때 3억 무상, 2억 유상, 상업차관 3억 플러스알파가 됐다. 그 상업차관을 위해서 지금 유수한 우리나라 기업들이 전부 국교정상화 전부터 꾸준히 교섭을 했고, 삼성 같은 경우에는 울산 비료공장이죠? 한일합섬, 쌍용시멘트, 이런 굵직굵직한 우리나라 기간산업들 전부 그때 일본 상업차관을 들여서 공장을 확충했다. 쌍용은 일거에 200만 톤 생산 캐퍼시티로 시멘트 공장을 늘렸다. 이게 전부 우리나라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밑거름이 됐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아시다시피 수입대체산업을 건설하는 거였다. 수입대체산업이란 비료공장 같은 거다. 그래서 비료의 자급자족을 기할 수 있었던 건, 말하자면 일본에서 받은 상업차관이 크게 기여를 했다.
그리고 한일회담 마지막 순간에 김·오히라 메모에 의한 청구권자금이 일제 36년 식민지의 대가냐 하는 비판들이 있었지 않느냐. 그래서 정부가 그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서 김·오히라 메모를 보강할 수 없느냐, 그래서 최소한도의 유상경제협력 2억을 늘리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되니까 그럼 유상 차관 2억에 대한 이자를 좀 더 낮추자고 했다. 지금 기억이 확실하지 않은데, 그 이자가 2% 정도 되는 것 같다. 소위 말하자면 ODA인데, 그 이자를 더 낮추려고 했다. 정부가 그런 훈령을 내려서 마지막 단계에 교섭을 했는데, 김동조 차관이 쓰신 회고록 ‘회상 30년 한일회담’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ODA 차관의 이자를 줄이려는 교섭에 관해서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대장대신이 “어려운 이자를 낮추려고 해봐야 얼마가 되느냐, 그거보다는 상업차관을 늘려서 하루 속히 공장을 짓고 경제를 빨리 부흥시키는 게 더 유리한 거 아니냐?”하는 이야기를 했다. 김동조 장관이 한일회담을 마치고 쓴 회고록에서도 “그때 우리가, 경제기획원 관료들이 좁은 생각을 하지 말고 상업차관을 3억이 아니라 5억으로 늘렸더라면 경제 건설이 그 정도 더 빨리 촉진되지 않았겠느냐”하는 이야기를 한다.

- 당시 한일회담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었다. 청구권자금 액수 문제도 있지만, 역사인식에 대한 한·일 간의 이해관계 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채 이루어진 타결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비판을 받은 것 같다. 당시 이루어진 한일회담 전반에 관한 비판과 평가에 대해 장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 우선 국내의 반대 논리 가운데 하나는 청구권자금 액수와 관련한 것이었다. 곧 김·오히라 메모에 대한 반대였다. 둘째는 “일본의 일제 36년에 대한 반성을 우리가 충분히 받지 못한 굴욕외교다”라는 논리였다. 실제 청구권자금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1964년 6월 3일 처음 동북아과에 나왔을 때 김·오히라 메모를 보여달라는 게 시위대들의 요구였는데, 이때 일본의 총 외환보유고가 18억 정도였다. 김종필 총리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물론 10년간에 걸친 것이었지만 거기서 말하자면 배상 문제를 위한 금액을 5억으로 결단했다는 거다. 그때 일본으로서는 큰 결단을 했다고 이야기를 한다. 지금은 5억이 적지만 그 당시 화폐가치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고, 한국에 들어와서 10년 동안 정부가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 금액으로 첫째는 그때 마산 자유무역지대에서 경운기·분무기 등 농기구를 생산했다. 그게 우리나라 농촌이 근대화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다음에 경부고속도로 지을 때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차관을 구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IBRD가 와서 조사하고 나서 “서울에서 대전까지는 경제적인 가치가 있고, 부산에서 대구는 경제적 가치가 그것대로 있는데, 대구와 대전 간은 아무런 경제적인 메리트가 없다”는 결론을 내고 차관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때 일일 경제권을 구성하려고 경부고속도로를 지으려는데, 중간 허리를 딱 잘라놓고 세계은행이 버티고 있는 상황인 거다. 그때 그 가운데 부분을 한국이 보유하는 외화자금으로 충당하겠다고 했다. 그땐 KFX(한국정부보유외환)라고 했다. Korean Foreign Exchange의 약호일 거다.
1970년대 초에 와서 포항제철을 만들려고 할 때도 IBRD가 조사를 했다. 당시에 우리가 철을 국내에서 생산하게 되면 톤당 160~180달러 정도가 드는데, 당시 시장가격은 120달러라는 거다. 그래서 “수입하는 게 훨씬 싸다. 제철공장은 경제 발전하는 나라들이 다 프레스티지 프로젝트(과시용 사업)로 시도를 하는데, 인도의 경우에도 소련의 차관으로 제철공장을 지어서 적자에 허덕인다”고 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철강 산업 없이는 국가경제가 성립이 안 된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다. 그러면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야하다 제철소의 기능이 800만 톤이었다고, 일본의 강철 생산능력 숫자까지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지휘하면서 자금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주한 일본대사인 가나야마 마사히데를 통해 사토 에이사쿠 총리에게 친서를 보내면서, 그 친서를 가지고 가서 일본 자금을 확보해 오라고 했다. 만약 안 되면 돌아올 필요 없다고 했다. 그때 일본에게 “포항제철 건설자금 일부는 우리가 종잣돈을 낸다”고 했고, 그게 경제 청구권자금이었다.
소양강댐은 우리가 지었다. 소양강댐은 콘크리트가 아닌 흙으로 쌓아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댐이라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생긴 비료공장이나 발전시설, 도로 등 인프라는 결국 청구권자금이 종잣돈이 된 거다. 1977년에 한일경제협력에 의한 청구권자금 10개년을 사용한 후에 경제기획원이 ‘청구권자금 백서’를 발간했다. 그 백서에 언급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청구권자금에 대한 다과를 논함에 있어 만약 그때 그 돈을 안 들여오고 우리 경제건설을 우리 손으로만 하고 있었다고 하면, 북한과 별로 차이가 없을 거 같다. 우리가 그래도 1965년, 그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 돈을 적절히 썼기 때문에 1970년대 이후에 제 2·3차 경제계획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거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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