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군대학 교관으로 있던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1840~1914)은 1890년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Power upon History)’을 발표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는 이 책은 20세기 이후 미국의 운명을 바꿔 놓은 세계전략 지침서가 됐다.

마한은 미국이 세계 해군국이 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로 대해군의 건설, 해외 해군기지의 획득, 파나마운하의 건설 그리고 하와이왕국의 병합을 제시했다. 미국은 마한의 교과서대로 서태평양으로 진출해 오늘날 세계 패권국가가 되었다.

1997년 덩샤오핑의 유해가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대해(大海)인 태평양에 뿌려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태평양 진출에 대한 덩샤오핑의 유언이 있은 후10년 뒤 후진타오는 ‘대양해군’을 선언했다. G2로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고 있는 중국은 내년까지 모두 5척의 항공모함을 서태평양에 띄울 예정이다.

마한과 중국의 ‘해양굴기’보다 1400년 전에 신라는 해양력을 키운 해륙정책(海陸政策)을 펴서 삼한을 일통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나당7년전쟁에서 당시 세계 최강인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한민족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신라는 건국 후 500년 이상 약소국이었는데,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그 배경의 하나로서 해양발전이라는 국가전략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지도자의 활약을 들 수 있다.

22대 지증왕은 512년에 본격적인 영토 확장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해, ‘김이사부’가 지휘하는 신라 수군은 동해 중부의 항구를 출항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160여㎞ 떨어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했다.

이사부는 새로 설치한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해양작전을 준비했고, 고구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실지 회복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울진, 삼척, 강릉 등 항구와 동해 중부 횡단 항로를 관할하면서 해양활동 범위를 확장시켰다.

23대 법흥왕은 517년에 병부를 설치해 군사력을 강화한 후 532년에 금관가야를 접수하여 남해안 일대의 물류망과 해양력을 흡수했으며, 일본열도와 교류할 수 있는 교두보까지 확보하면서 국제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24대 진흥왕은 551년에는 한강 상류인 죽령(소백산맥) 이북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탈취하였으며, 562년에 대가야를 합병했다. 이후 신라는 남해안과 낙동강 수로망, 남한강과 서울지역을 낀 한강 본류의 수로망을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는 남양만(화성)을 이용해 중국과 해양교류를 펼치면서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진입했고, 훗날 삼국통일의 강력한 군사력이 된 서해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갖춘 해륙국가의 토대는 100여 년 뒤에 삼한일통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왜국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신라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하고 난 후 왜국을 침략할 것에 대비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30대 문무대왕과 김유신 대장군은 당나라에 유학 가 있던 의상대사를 통해 동북아 정세를 파악한 후 670년 봄 설오유가 이끄는 1만의 신라 특수부대와 고연무가 이끄는 고구려부흥군 정예병 1만 병력으로 압록강 너머 봉황성(鳳凰城, 오골성)을 선제공격한 후 나당7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300년 전의 당나라나 그 후예인 중국은 여전히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중국을 향해서는 한없이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한번 붙어보자는 식의 태도로 일관하는 못난 위정자들이 있다.

대왕암에 잠들어 있는 문무대왕이 지금 마음이 편치 못해 포효(咆哮)하고 있다. 후세의 포폄(褒貶)을 두려워하지 않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위정자들에게 고한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覆水不返盆·복수불반분).

백성이 원망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民怨則國危·민원즉국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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