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기 수첩서 제기된 靑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 [뉴시스]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지난 2016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국정농단 사건’. 하루가 멀다하고 충격적인 소식이 쏟아지던 당시 상황에서 진실 규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수첩이었다. 안 전 수석은 이 수첩에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받은 지시와 함께 외부 인사들의 면담 내용까지 기록했다. 안 전 수석이 기록한 자료의 양은 약 2년간 63권, 검찰에 제출된 수첩만 56권이었다. 세상을 떠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도 마찬가지다. 김 전 수석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지난 2014년과 2015년 수석비서관회의 내용을 날짜별로 상세히 적었다. 김 전 수석의 노모는 아들이 별세한 뒤 “억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겠다”며 이 비망록을 공개했고, 국정농단 사태의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 이처럼 고위공직자들의 수첩은 어떤 사건을 수사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이번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사건에도 ‘송병기 수첩’이 등장했다.

‘안종범 수첩’ 때처럼…‘제2의 국정농단’ 사태 촉발하나
검찰, 송병기에 구속영장 신청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이 속도를 내고 있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이 검찰에 2차례 출석해 조사를 받은 데 이어 임동호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의원 등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 잇따라 소환됐다.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것은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의 업무수첩을 검찰이 확보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김태은 부장)는 송 부시장의 집무실과 자택 등을 압수수색, 송철호 울산시장의 선거캠프 활동 당시 캠프 내 회의내용과 일정 등이 적힌 업무수첩을 확보했다. 송 부시장의 업무수첩은 A5용지 크기로 이번 사건의 단서가 되는 내용이 다수 적힌 것으로 알려졌다. 송 부시장이 선거 캠프의 활동을 상당히 꼼꼼히 기록해 뒀다는 것이다.
지난 15일과 16일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은 김기현 전 울산시장은 “송 부시장이 2017년 가을경 작성한 업무수첩에 ‘BH회의’라는 문구가 기재된 부분을 확인했다”며 “검찰 조사 중 청와대에서 경찰로 직인 없이 내려 보낸 문서 등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BH(Bule House)는 청와대를 뜻하는 단어다. 김 전 시장의 주장에 따르면 청와대와 송 시장 측은 지난해 지방선거 전부터 교감을 나눴다는 뜻이 된다. 김 전 시장은 또 이 업무 수첩에서 청와대 정 모 비서관과 이 모 비서관의 이름을 목격했다고도 강조했다. 검찰 역시 송병기 수첩에서 ‘BH’나 ‘VIP(대통령)’ 등의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직 시장도 아닐뿐더러, 출마 선언도 하기 전인 인물 측근의 수첩에서 청와대와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송 시장의 출마 시기부터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검찰이 확인한 송병기 수첩 중에는 ‘당내 경선은 송철호가 임동호보다 불리하다’는 내용과 VIP, 송 시장 경쟁 후보들과 관련한 내용이 적힌 것으로 알려졌다. 또 ‘VIP가 직접 출마 요청하는 것을 면목 없어 해 비서실장이 요청한다’는 메모도 적혀 있다.

송병기 “업무수첩은 메모장…검찰이 개인 내용 도감청 의혹”

송 부시장 측은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송 부시장은 지난 23일 오전 울산시청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저의 개인적인 내용을 도·감청한 것 같다”며 반격에 나섰다. 검찰이 조사 과정에서 자신과 송 시장이 단둘이 나눈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들려줬다는 것이다. 그는 “대검찰청과 법무부에 도·감청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송 부시장은 “제가 송 시장님과 통화한 개인적인 대화까지 녹음된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며 “자리에서 검사에게 이의 제기해 ‘합법적인 영장으로 진행했냐’고 물었으나 답변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시장님과 저 둘만의 통화내용이기에 분명 우리 두 사람이 제보하진 않았으니 도·감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 부시장은 또 “이 사건으로 가족과 집에서조차 마음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면서 “불법 감청이 의심되는 사항에 대해 합법적인 절차인지 조사하고 판단할 것을 정식으로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송 부시장은 각종 의혹이 적힌 ‘송병기 수첩’에 대해서는 “업무수첩은 일기 형식의 메모장에 불과하다”며 “검찰이 단정하고 있는 업무수첩이 아니라 풍문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사건과 관련해 그 어떤 허위사실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송 부시장이 ‘안종범 수첩’ 판례를 참고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과거 대법원은 안종범 수첩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직접 받아 쓴 대목은 간접 정황 증거로 인정했지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적은 내용은 인정하지 않았다. 내용의 신빙성을 업무수첩이 아닌 말을 직접 했던 재벌 오너들이 확인해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자신이 적은 내용을 ‘풍문’이라고 주장해 증거 능력을 상실케 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송병기 수첩에는 BH회의나 VIP 등의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하고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이같은 전략이 통할지는 의문이다. 검찰 측은 “송 부시장의 수첩은 수사의 단초가 될 뿐”이라면서 “수첩 내용을 바탕으로 추가 수사를 통해 다른 증거들을 확보해가고 있다”고 전했다.

송병기 수첩이 불러올 결과는?

27일 검찰은 송 부시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지난달 26일 청와대와 경찰의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 수사에 나선 지 한 달 만이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에는 송 부시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는 경찰과 청와대 관계자들의 공범으로 적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한병도 전 정무수석 등 청와대가 송 시장 단수 공천을 위해 경쟁자였던 임 전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고베 총영사 등의 고위직을 제안했다는 ‘후보매수 의혹’은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은 송 시장 측과 청와대가 이러한 과정을 논의했을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어쩌면 ‘제2의 국정농단’ 사태의 스모킹건이 될 송병기 수첩의 수사가 어떤 결론을 맺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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