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라는 개념은 로마시대에 처음 생겼다. 로마 공화정 당시에 원로원은 국가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위기에 대처하도록 권한을 대폭 위임하는 독재관을 임명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독재’는 20세기 들어서야 민주주의에 반하는 개념으로 정립되었다. 독재는 현대 정치체제에서 유일선(唯一善)으로 자리 잡은 민주주의가 아닌 나머지를 일컫는 개념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본심이야 어쨌든 어떤 정치인이나 정치세력도 민주주의 밖에 서려고 하거나 공공연하게 독재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민주주의만큼이나 독재 또한 원래 뜻이나 유래와 상관없이 정치적 공방에 쉽게 이용되고는 한다. 나는 민주주의자이고 내 행동은 민주적 원칙에 따른 것이며, 정적은 쉽게 독재자로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되고는 한다.

어떤 사람이 독재자인가? 독재자의 기준은 무엇이 있을까? 트럼프 당선 직후 미국의 민주주의 위기를 경고하는 내용을 담은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는 독재자를 판별하는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이 책에 따르면 독재자는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한다.

요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그 정부를 “독재자”, “좌파독재”라며 극한적 정치대립을 주도하고 있다. 전형적인 프레임 덧씌우기 전략이고 합당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 한국당은 문 대통령이 독재자의 기준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왜 좌파인지, 왜 독재인지를 설득하지 못하고 강변만 해서는 승복하기 어렵고 식상하게만 다가온다. 

정치적 메시지는 국민의 보편적 인식과 조응해야 한다. 문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려면 국민들이 독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평범한 국민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독재자라 불릴만한 사람은 박정희, 전두환을 들 수 있다. 과연 문 대통령이 박정희와 전두환에 비견할 만한 절대권력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좌파독재란 단어도 불쾌한 뒷맛을 남긴다. 좌파독재는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의도적 오용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방을 좌파독재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다”라고 주홍글씨를 찍는 행위와 다름이 없다. 좌파독재는 ‘빨갱이’를 ‘빨갱이’라 공공연히 부를 수 없는 불우한 시대를 살아가는 보수우파들이 내뱉는 유언처럼 들린다.

돌아보면 타임지에서 공식적으로 인증한 ‘독재자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독재자란 비난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테러방지법으로 사회를 옥죄려 한다는 비난을 듣고, 국정농단으로 탄핵을 앞둔 순간에도 박 전대통령은 ‘수첩공주’라는 멸칭을 들었을 뿐이다. 박 전대통령을 독재자로 부르기에는 우리 국민들이 피로써 진전시켜 온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한국당이 좌파독재를 외치고 문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탄하는 부조리극 같은 현실은 오랜 세월 동안 한국사회의 주류였던 보수정치 세력이 왜소화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사회는 역사적인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권력을 누리던 주류세력이 주변으로 물러나는 극적인 세력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권력을 누려오던 세력이 더 이상 권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파괴적이고 퇴행적인 정치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사실이다. 정당의 생명력은 그 정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왕성해지지만,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패배의식을 곱씹게 되는 순간 극단적 정치행위를 서슴지 않게 된다. 21세기 한국은 비주류로 물러나는 중인 독재세력의 후예들이 탄압받던 진보개혁 세력을 독재자로 몰아붙이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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