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노국공주의 죽음, 신돈의 등장과 망동

이야기는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안방의 다락문에는 네 폭의 화조도(花鳥圖)가 장식되어 있었다. 이 다락문을 등지고 그 앞에 사방침(四方枕)이 하나 놓인 보료 위에 한 요염한 계집이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이때 험상궂은 사내가 안방 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섰다. 성급한 사내는 계집 옆으로 가서 계집을 번쩍 안아 보료 위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계집의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옷깃을 헤쳤다.
터진 앞섶으로 백설 같은 속살과 탐스러운 젖무덤이 드러났다. 탄력 있고 요염한 가슴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사내를 유혹하고 있었다. 색욕에 불타는 사내는 마른침을 꿀컥 삼킨 뒤에 성난 늑대처럼 계집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사님, 어찌 이리 급하게 나대십니까?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계집이 색기 넘치는 목소리로 앙탈했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흐흐흐……. 오늘은 날씨도 화창하니 춘심이 발동하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건 대낮에 어찌…….”
“너를 볼 때마다 이렇게 아랫도리에 힘이 솟구치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겠느냐?”
“밖에서 아랫것들이 엿듣겠습니다.”
“걱정마라. 다 조치해놓았다.”

사내는 입었던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허겁지겁 계집의 가슴을 애무하며 입술을 덮쳤다. 계집은 두세 번 몸을 꼬더니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사내의 목덜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사내는 공을 들여 애무를 계속해 계집의 몸을 불덩어리로 만들어 놓고서야 서서히 돌입했다. 두 사람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었다.

사내는 중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성전(性典)인 《소녀경》을 줄줄 외고 있어서, 거기에 씌어 있는 대로 구천일심(九淺一沈), 좌삼삼우삼삼(左三三右三三), 약입강출(弱入强出) 등 온갖 재간을 다부렸다. 화류계에서 잔뼈가 굵은 계집은 이에 질세라 아랫도리를 요리조리 놀리며 요분질을 했다.

이내 두 사람은 욕정의 포로가 되었고 방안은 열락의 도가니로 변했다. 눈을 허였게 까뒤집은 계집의 비명 같은 신음소리는 문밖으로까지 새어나왔다.

사내의 이름은 신돈(辛旽)이고 계집은 기현(奇顯)의 후처다. 기현은 신돈을 자신의 집에 거처시키고 주인처럼 모시며 횡포와 권세를 누린 난신(亂臣)이다. 신돈은 기현을 자신의 심복으로 부렸다.

《고려사》에는 신돈을 요승(妖僧)으로 묘사하고 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우왕과 창왕의 실제 아버지가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이며, 신돈은 처첩을 거느리고 주색잡기에 몰두한 요승이다.

신돈은 경남 창녕군 영산 사람으로, 어머니는 계성현에 있는 옥천사의 여종이었다. 그는 승과를 치르지 않고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 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라 했다.

신돈이 공민왕을 처음 만난 시기는 1358년(공민왕7)이다.

이때 이제현은 공민왕의 초기 개혁을 마무리 짓고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절이었다. 이 무렵 공민왕은 유학자 중심의 관료집단의 힘이 너무 강해지자 불교세력을 통하여 그들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는 승려 보우의 선(禪) 사상에 몰입하여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신돈은 한량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우연히 알게 된 명덕태후의 인척으로 공민왕의 측근인 상장군 김원명(金元命)에게 말했다.

“나는 옥천사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여 득도(得道)했다.”

무인 출신으로 지모가 부족했던 김원명은 마침내 큰소리치는 신돈의 마수(魔手)에 걸려들게 되었다. 그것은 공민왕은 물론 자기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공민왕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한 스님이 달려와 구해줬다고 한다.

어느 날, 공민왕은 김원명의 소개로 신돈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공민왕은 신돈의 얼굴이 꿈에서 본 스님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연유로 신돈은 궁중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신돈의 설법은 보우 같은 고승에 비하면 깊이가 떨어졌다. 그러나 민초들과 부대끼며 보고 들은 세상의 희로애락이 생생히 녹아 있고,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개혁의 동력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공민왕은 이내 신돈에 빠져들게 되었다.

독실하게 불교를 신봉한 공민왕은 신돈을 만나면 심기가 편안해지고 즐거웠다. 그만큼 신돈은 왕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영리하고 총기가 넘치는 중이었다. 그에 반하여 공민왕의 혜안은 점차 무디어가기 시작했다.

1358년(공민왕7) 가을.

예나 지금이나 ‘발 없는 말은 바람보다 빠른 법’이다. 개경 사람들은 “공민왕이 신돈에 빠져있다”고 수군댔다. 장안에 파다하게 퍼진 이 소문은 바람에 실려 바람 보다 빨리 이제현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며칠을 전전반측(輾轉反側) 고민하던 이제현은 백발을 성성하게 휘날리며 입궐하여 공민왕에게 신돈을 경계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신돈은 골법(骨法)이 옛 흉인(凶人)과 같으니 가까이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명종 시대의 요승 일엄(日嚴)은 스스로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다”라고 칭하면서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을 낫게 할 뿐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려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현혹한 적이 있습니다. 일엄은 젊은 여자들을 동굴로 불러들여 부처가 현신하여 부정한 몸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면서 사통하고 재산을 갈취했습니다. 자신의 발을 씻은 물이 법수(法水)라고 하여 팔기도 했습니다. 신돈은 요승 일엄과 같은 전철을 밟으며 여자들과 불륜관계를 맺고, 많은 가정을 파탄시키고 있는 자입니다. 뒤에 변고가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청컨대 멀리하시옵소서.

신돈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단 이제현 뿐만이 아니었다. 이조년의 조카로서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이승경(李承慶)은 신돈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이 중놈이 될 것이다.”

이제현의 문생인 이인복(李仁復)도 비판 대열에 동참했다.

“신돈은 사람의 탈을 썼으나 사람이 아니다. 훗날 반드시 큰 화를 초래할 것인즉 일찍이 물리쳐야 한다.”

강직한 무장인 서북면도순찰사 정세운(鄭世雲)은 신돈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신돈은 요승이기 때문에 차라리 죽여 버려야 한다.”

공민왕은 이들을 좋은 말로 달래고 나서 신돈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당부했다. “이승경, 정세운 등이 대사를 암살할지도 모르니 몸조심하시오.”

신돈은 공민왕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피해 다니며, 다시 머리를 깎고 두타승(頭陀僧)이 되었다. 그가 다시 대궐에 들어가 권세를 부리게 된 것은 이승경과 정세운이 죽은 뒤인 1364년부터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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