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한파’라는 말이 있다. 한 해의 끝 무렵에 휘몰아치는 추위를 뜻하는데, 여러모로 연말이 되면 따뜻한 온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날씨마저 무심하게 추워져서 안타까움을 나타낼 때 쓰이고 있는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세밑 한파’가 몰아쳤다.

그런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정치적 ‘세밑 한파’에 온전히 휩쓸려간 정치인이 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다. 자유한국당은 정기국회가 끝난 후의 패스트트랙 정국 2막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막아내지 못했다. 뒤이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안도 역시 여당의 뜻대로 국회를 통과했다. 황교안 대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내겠다고 한 것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세찬 ‘세밑 한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은 황교안 대표가 대한민국 입법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이해도 없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삭발하고 단식하며 거리로 나서는 이른바 ‘쇼 정치’에 몰두한 결과이다. 이 ‘세밑 한파’로 자유한국당은 다가오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존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황교안 대표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황교안 대표는 이러한 ‘세밑 한파’가 자신을 엄습하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만약 모르고 있었다면, 그는 당장 정치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의 정치적 언동 하나하나가 대한민국 보수정치의 싹을 잘라내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교안 대표가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안 등 소위 패스트트랙에 오른 법안의 철회를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던 것은 작년 11월20일의 일이다. 단식 엿새째인 11월 25일 홍준표 전 대표가 황교안 대표의 단식농성장을 찾았다. 그리고 황교안을 살리는 ‘신의 한 수’를 훈수하고 나왔다.

홍준표 전 대표가 당시에 밝힌 훈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공수처 법안, 검경 수사권 조정법안, 그것을 민주당과 협의해서 통과시켜 주자”고 했다. “연비제에 대해선 민의에 반하는 제도다. 만약 그것까지 강행 처리하면 우리는 총선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교안 대표는 정치선배의 진정성 있는 충고를 보기 좋게 걷어찼다. 그리고 보수의 위기를 초래했다. 자승자박의 결과다.

공직선거법과 공수처법이 국회를 통과한 뒤, 홍준표 전 대표는 지난해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무능함을 보여준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총 사퇴하고 통합비대위를 구성해야 한다. 그동안 목숨 걸고 막는다고 수차례 공언 하더니만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무기력하게 모두 여당에 줘 버리고 이젠 어떻게 할 거냐? 뭘 믿고 여태 큰소리 친 거냐?”라며 황교안 대표를 강하게 비난했다. 홍준표가 황교안을 비난할 자격은 충분히 차고도 넘쳐 보인다.

그렇다면 황교안 대표가 할 말이 없을까? 황교안 대표의 지난 1년 동안의 일관된 정치적 행동은 국회와 국회의원을 경시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현역 국회의원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수 세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여의도의 보수 세력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유한국당과 보수 세력의 위기를 극대화시킨 후에 선거를 앞두고 반문연대로 보수통합을 이루고, 자신은 옥쇄(玉碎)작전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고 총선에서 보수 세력이 승리하면 대권으로 직행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수의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 어쩌면 홍준표 전 대표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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