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10·26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쏜 김재규. 발생한지 사반세기가 지난 ‘10·26 사건’은 아직도 ‘과거’가 아닌 ‘현실’로 존재한다. 이는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일고 있는 최근 몇 년 전부터의 움직임과 무관치 않다. 논의의 주된 내용은 10·26 사건을 종전의 역사적 관점과는 다른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김재규 본인이 사전에 계획한대로 이루어졌지만, 쿠데타가 아닌 일종의 ‘민주화 혁명’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은 10ㆍ26 사건이 없었다면 유신체제가 상당기간 존속됐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출발한다.


김재규의 유족들과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공동대표 함세웅 신부, 강신옥 변호사 등)’는 지난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김재규의 민주화 보상 신청서를 접수했다.
이듬해, 김재규 건은 3시간여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보류 및 계속 조사’라는 잠정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인용’과 ‘기각’을 모두 피한 결정. 이는 근거 기록과 증인 등을 더 수집한 후 매듭짓겠다는 조처이며, 27년이 지난 10·26이 현실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신 종식 vs 우발 사건
김재규 재평가에 있어 핵심 쟁점은 ‘민주화에 기여했는가’이다.
“본인이 결행한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은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10·26 이후 유신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됐다.”
80년 1월28일, 김재규가 작성해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 내용이다. 김재규의 민주화 공적을 주장하는 유족과 관련자들은 대체로 김재규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신헌법으로 성립된 권위주의 정권인 박정희 정권에서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고, 유신체제에 의해 파괴된 민주헌정 질서의 회복에 기여했다는 것.
하지만, 당시 부마항쟁 등 박정희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 견해도 없는 것은 아니다. 김재규의 행동이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그 뒤 5·17 쿠데타를 통해 더욱 폭압적 군사정권인 전두환 체제가 들어섰다는 데서 찾고 있다. 이들에게 10·26은 박정희 유신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민중항쟁이 거셌고,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조그마한 사건일 뿐이다.
유신체제를 유지했던 가장 강력한 억압기구가 바로 중앙정보부였다는 점에 주목하는 인사들도 있다.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고 고문했던 기관의 장이 바로 김재규였다는 것. 따라서 단지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며, 다른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회적 공론화도 요원
한편, 김재규의 재평가 논의 그 자체를 반대하는 세력도 있다. 대표적인 단체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이들은 ‘김재규 민주화 열사 추대 반대집회’를 여는 등 김재규의 민주화 관련 인정 가능성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과 권력 다툼에서 빚어진 김재규의 우발적 살인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박사모는 “김재규가 민주 열사라면, 박정희는 민족 반역자인가?”라고 묻는다.
이처럼 ‘김재규 민주화 심의 문제’는 민주 대 반민주, 또는 유신 대 반유신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민주화 보상 심의위원회가 3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보류 및 조사 계속’이라는 결론을 내린 데서도 고민의 흔적이 묻어난다. 김재규에 대한 심의 결과는 곧,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김재규 민주화 심의 문제가 사회적 공론화 장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인지도 요원해 보인다.
이와 관련, 강신옥 변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더 이상 제출할 자료나 증인은 없다”면서 “민주화 보상 심의위원회가 ‘보류 및 계속 조사’라는 결론을 내린 이상 심의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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