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

공민왕은 두 얼굴을 가진 군왕이었다.
그는 성품이 신중하지만 잔인할 만큼 냉혹한 권력자였다. 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충신을 배역(背逆)으로 몰아 죽이며, 잠재적 경쟁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한 가혹한 군주였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왕의 천성은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비록 심복 대신이라도 그의 권세가 성해지면 꺼리어 죽였다.
격변기의 개혁을 이끄는 권력자라면 필연적으로 마키아벨리적인 속성을 띠기 마련이다. 개혁군주 공민왕의 숙명이 그것이었다. 그처럼 의심이 많고 잔혹한 공민왕에게는 영혼의 위안을 받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영혼의 안식처요 도피처가 바로 노국대장공주, 인덕왕후(仁德王后)였다.
공민왕은 국왕이 된 후 끊임없이 원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정책을 추진해왔는데, 노국공주는 스스로 고려인을 자처하며 공민왕의 반원자주 정책을 도왔다. ‘흥왕사의 변’ 때는 왕을 보호해 생명의 안전을 지켜주기까지 했다.
이처럼 노국공주는 진정으로 공민왕을 사랑했다. 그녀는 공민왕에게 ‘장한가(長恨歌,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노래)’ 속에 나오는 사랑을 맹세하는 구절을 읊조리며 영원불멸한 부부의 연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곤 했다.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길 원하오며, 땅에 있을 때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길 바라옵니다.
비익조는 날개와 눈이 하나뿐인 새로 두 마리가 합쳐야 비로소 날 수 있으며, 연리지는 따로 성장한 두 나뭇가지가 붙어 하나로 보이는 형상으로 모두 부부의 깊은 애정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는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 해어화)이다”라며 꽃보다 예뻐했듯이,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오염되지 않는 한 떨기 연꽃으로 여기고 사랑했다. 그러나 ‘미인은 화근이 된다(紅顔禍水 홍안화수)’는 말처럼 노국공주의 아름다움은 곧 재앙을 불러오는 화근이 된다.

당의 양귀비는 ‘안사의 난(安史亂)’으로 현종과 함께 촉(蜀) 땅으로 도망가던 중 현종을 호위하던 근위군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였다. 비익조, 연리지를 꿈꾸던 두 사람의 사랑이 양귀비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되자 융성하던 당나라도 슬슬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듯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되자 개혁의 길로 들어선 고려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노국공주가 죽기 전의 일이다.
결혼해서 15년 동안 자식이 없던 노국공주에게 불공 바람인지 태기가 있었다. 고려 왕실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공주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과인이 뭐라고 했소? 공주는 반드시 태자를 낳을 것이니까 다른 비를 맞는데 반대한 게 아니요?”
“…….”
“공주, 꼭 왕위를 이을 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를 낳아야 하오.”
“전하, 그것을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겠나이까.”
“공주, 틀림없이 왕자일 게요.”
“아이, 전하는…….”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바람을 외면했다. 산달이 가까워졌지만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처럼 공주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중년의 나이로 어렵게 임신한 공주는 출산할 때가 되었을 때 크나큰 진통을 겪으며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공주의 병환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공민왕이 공주전으로 달려갔다.
“상감마마, 소첩은 자꾸만 힘이 빠져 움직일 수 없어요.”
“공주, 힘을 내야 해요. 공주!”
“상 - 감- 마- 마, 소첩을 안아 주세요.”
“공주, 과인이 있지 않소. 걱정 말아요.”

이렇게 출산의 고통에 시달린 산모를 지켜보는 공민왕은 안절부절 못하며 불안해했다.
공민왕은 내원전 불당에서 간곡히 기도드렸다.
“아들도 딸도 필요 없으니 공주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조정에서는 참형, 교형 이외의 죄수를 사면하고 각 사찰에 기도드리기 위해 궁궐 곳간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도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지루하게 며칠이 흐르는 동안 전국 도처에서는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왔다. 남쪽 해안 지방에서는 겨울 해일로 많은 어부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개경에서는 괴이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밤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노국공주의 죽음과 공민왕의 성격파탄

1365년(공민왕14) 2월 갑진일.
세차게 쏟아지던 봄비가 무시무시한 천둥 번개를 동반했다. 산실청은 비상이 걸렸다.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진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노국공주의 애처로운 소리가 산실청 밖으로까지 퍼져나왔다.
“왜 이리 더디다더냐!”
명덕태후 홍씨는 발을 동동 구르며 초초해했다. 공민왕은 대전에서 산실청의 소식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밤은 깊어 마침내 자시로 접어들었다. 공민왕이 기다리다 지쳐 대전의 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서자,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달려오는 내시의 모습이 보였다. 이강달이었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난산(難産)으로 인해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사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공민왕은 망연자실하여 그만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전하가 쓰러지셨다!”
“전하, 전하!”
노국공주는 공민왕에게 아내인 동시에 정치적 반려자였다. 공주의 죽음은 계속되던 전란에 지친 공민왕을 절망감에 사로잡히게하였다. 사랑을 잃은 왕은 시리고 아팠다. 왕은 공주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공민왕은 무리를 잃은 기러기, 짝을 잃은 원앙처럼 슬픔에 겨워 잠시도 노국공주의 시신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단장(斷腸)의 오열을 했다.
조정의 원로이자 임금의 장인이기도 한 이제현은 노국공주의 죽음에 망연자실했다. 왕비가 죽은 후 자신의 딸인 혜비가 정비(正妃)가 되는 상황이었지만 불길한 생각이 앞을 가렸다. 공민왕이 너무나 사랑했던 왕비의 죽음이었기에 필경 공민왕이 정신적으로 타락하고 그 결과 조정에 암운이 드리우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심사숙고하던 이제현은 민망하여 공민왕에게 아뢰었다.
“전하, 온 백성이 국모를 잃은 슬픔에 오열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주상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이시옵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중전마마를 빨리 잊기 위해서라도 다른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시지요.”
그러나 돌아온 비답은 공허한 말뿐이었다.
“내 한 몸만 편하자고 공주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멀리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전하, 종사를 위해 옥체를 보존하셔야 하옵니다.”
“나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전하, 하늘나라로 떠나신 중전마마께서도 전하의 건승을 기원하고 계실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노국공주가 너무 불쌍해서 나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전하…….”

공민왕은 이후 사흘간 조회를 폐했다. 모든 관원들은 검은 갓에 흰 상복을 입었다. 빈전에서 사찰까지 제를 올리는 깃발이 길을 덮었고, 비단으로 절 건물을 휘감았다. 공주의 극락왕생을 비는 스님들의 범패(梵唄, 경 읽는 소리)소리, 바라(罷漏)소리와 북소리는 대지를 뒤흔들었다. 막대한 장례비용이 들어 국고가 텅텅 빌 지경이었다. 대단하고 화려한 국상이었다.

노국대장공주의 묘는 현재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에 위치한 정릉(正陵)으로 공민왕릉인 현릉(玄陵)과 나란히 있는 쌍무덤이다. 쌍무덤 중 동쪽의 것이 정릉이고 서쪽의 것이 현릉이다.

노국공주의 국상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났건만 공민왕은 왕비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 자신을 자학하며 나락 없는 슬픔의 세계로 몰입하는 상황이었다. 왕은 노국공주의 초상과 마주앉아서 음식 드는 절차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다.

명덕태후 홍씨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들 공민왕을 나무랐다.

“주상, 어째서 다른 비빈(妃嬪)들은 가까이 하지 않습니까?”

“태후마마, 노국공주만한 여자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자연의 이법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고작 그런 일로 수 개월 동안 애통해하시는 겁니까. 백성들이 알고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백성들의 신망이 소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민심을 잃으면 종사도 제대로 보전할 수 없다는 철리를 정녕 모르십니까?”

“소자는 노국공주에게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뿐입니다.”

“주상, 남편의 도리보다 국왕의 본분이 더 지엄합니다.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고 정사에 임하세요.”

“…….”

이처럼 명덕태후는 평소 공민왕에 대해 그의 허물을 자주 지적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모후를 만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공민왕은 궁인이나 환관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과인의 허물을 명덕태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공민왕이 갑자기 방황과 실정을 거듭하자 이제현을 앞세워 개혁정치를 펼쳐 욱일승천하던 고려의 국운이 갑자기 기울기 시작한다. 그 발단은 1365년 왕비 노국공주의 사망이었다. 노국공주가 갑자기 죽자 공민왕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이는 고려의 몰락을 예고하는 서글픈 서막이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 하지만 만약 노국공주가 일찍 죽지 않고 공민왕을 끝까지 보필했다면 고려의 역사가 달라져 있을 지도 모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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