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태극기와 일장기 [뉴시스]
태극기와 일장기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14년에 걸쳐 일본과 한일회담 타결”

▲ 협정영주권 마감은 1971년 1월 17일이었다. 아시다시피 당시 우리 재일동포 수는 약 60만 명이었는데, 이 세력분포로 보면 우리 민단 세력이 24~25만 명, 조총련이 34~35만 명이었다. 총련에 속하는 동포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실제로 조총련에 소속된 동포라 해도 모두 열렬한 조총련은 아니었다. 조총련의 소위 조직원으로서 활동하는 사람은 9만~10만 명 정도라고 일본 법무성도 파악하고 있었는데, 나머지는 입관상으로 1945년부터 조선족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거다. 한국 국적으로 등록을 해야 민단에서 이야기하는 한국 국적이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중에는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20만 명가량 있다고 봐야 하는 거다.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민단 쪽에 흡수하기 위해서는 협정영주권 신청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돌아와서 열심히 일했다.
우선 첫째는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협정영주권의 여러 가지 이점을 설명하고 홍보하면서 노력을 했다. 주일대사관을 비롯한 모든 공관, 민단 전 조직이 힘을 합해 홍보한 결과, 마감을 한 시점에서 우리 협정영주권 신청이 36만5000명까지 크게 늘어났다. 이후 1975년부터 재일동포들에 대한, 소위 말하자면 조총련계의 모국방문사업을 시작했다. 그 모국방문사업의 유공자가 조일제라는 분이다. 국회의원까지도 지냈는데,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주일공사, 주오사카총영사도 지냈다. 특히 조총련의 모국방문과 관련해서는 중앙정보부가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니 이분이 특히 열심히 사업을 시행했다. 아주 크게 성공했다.

- 결국 영사 문제도 당시에는 남북 관계 속에서 체제경쟁의 요소가 강했다.

▲ 그렇다. 직접 관련이 있다. 또 이때 협정영주권에 대해서도 시비 비판이 많았다. 큰 혜택이 적다고 해서, 여러 가지 후생조치를 보강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는데, 법무장관회담도 했다. 또 법무실무자 회담을 위해서 후에 법무부장관이 되는 당시 이선중 법무부 법무실장을 단장으로 수행해 가서 일본 법무성과 회의를 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 장관님께서는 한일회담을 타결하기 직전에 어업협정 관련해서 관여를 하고 계셨다. 그와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이 있다면 말씀을 듣고 싶다.

▲ 제7차 한일회담의 핵심은 어업협정 문제였다. 평화선 처리의 결과물이 어업협정인데, 사실 평화선에 대해서는 7차 한일회담 전에 양국 농상회담(농업상회담)에서 일단 평화선 대신에 양국이 규제수역을 갖는다는 선으로 대충 큰 윤곽은 잡혀 있었다. 그런데 이때 평화선을 우리가 양보한다니까 국내에서 “제2의 이완용론”이 나오면서 강력히 반대했다. 지금의 국제해양법 상식으로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가지는 입장에서 평화선은 지극히 당연한 건데, 1965년의 국제해양법 환경에서는 대단히 어려웠다. 당시만 해도 벌써 영해 3해리 하고, 소련이 주장하는 12해리가 영해의 폭을 가지고 맞설 때니까. 결국 “한국은 12해리의 전관수역을 가지고, 그 전관수역 밖에 규제수역을 둔다”는 체제로 평화선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
이때 제주도 주변의 수역이 가장 중심되는 문제였다. 본토하고 제주도 사이에 우리는 “일본 어선이 들어올 수 없는 내해를 두겠다”고 하고, 일본은 아주 결사적으로 “내해와 같은 성격을 인정할 수 없다. 너무나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한 거다. 이런 주장으로 반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내해를 지킨다는 방법이 한 가지였고, 둘째는 낙후된 우리 어업 장비를 현대화하고 일본 어선과 맞설 수 있는 어업 능력을 길러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일본에게 어업 현대화를 위한 자금 1억 달러 이상을 대가로 요청했다. 그래서 결국은 9000만 달러로 합의가 됐다. 이때 회담하다가 잠깐 휴식하는 시간에 일본 측 수산당국자들이 우리들에게 “3~4년 후에는 반대로 우리가 한국 수산업계의 공세를 받을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비웃었는데, 실제 5년이 채 안 되어 오히려 한국 어선들이 일본 근해에서 조업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9000만 달러라는 돈을 들여와서 우리 어선의 현대화에 기여하고 우리의 어업 능력을 길렀다는 이야기를 상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 그러면 제주도와 본토 사이에 내해를 설치하는 문제는 우리 주장대로 된 건가?

▲ 우여곡절 끝에 본토와 제주도를 잇는 전관수역이 인정됐는데 일본 측은 그 폭을 줄이기 위해 동쪽은 127° 7'로 하자고 하고 우리는 127° 13'이 돼야 한다고 해 한 달을 줄다리기한 끝에 일본 측이 양보했다. 참고로 서쪽 한계는 126°다. 이 부분은 김동조 장관의 회고록 ‘회상 30년 한일회담’에 잘 기술돼 있다. 혹시 연구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거다.

- 다음으로는 동북아과장으로 근무하셨던 시절에 관련해서 질문을 드리겠다.

▲ 당시 동북아과장이 치러야 할 커다란 연례행사가 하나 있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한·일 각료회의다. 그것이 결국 관계 각료 양측이 모여서 현안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항상 중요한 이익을 가져왔다. 14년에 걸쳐 진행된 한일회담을 1965년에 타결하는데, 그 당시에 기본조약을 협의할 때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다”라는 우리의 주장에 대해서 일본은 “현 휴전선 이북은 백지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기본조약에서 UN 결의안 248호를 인용하면서 명시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다”라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 정부가 UN 감시단이 들어와서 선거할 수 있는 지역에서 선출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건데, 명시된 것은 미군정이 관할하고 있었던 38도 이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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