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신돈이 왕의 신임을 얻었으니 더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요승의 욕망은 또 다른 야심을 낳아 끝내는 비극을 부른다. 신돈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니 민심은 흉흉해지고 국정은 난맥상을 보여 고려는 종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1363년(공민왕12)에 일어난 ‘흥왕사의 변’으로 인하여 공민왕 측근 세력들 중 다수가 희생되었다. 정세운, 홍언박, 김용 등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왕을 뒷받침해 오던 측근 세력은 붕괴되었다. 그 대신 홍건적의 고려 침공을 계기로 신진 무장세력들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을사년(1365, 공민왕14) 3월이 되었다.

진달래꽃과 개나리꽃이 온 산과 들을 붉고 노랗게 물들이며 화사한 색상과 자태를 뽐내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제현의 집 정원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러나 이 해의 봄은 시작과 함께 손끝 시린 찬바람을 몰고 왔다. 이제현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신돈은 궁궐을 자주 드나들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신돈은 자신을 공민왕에게 소개해준 김원명(金元命)을 공민왕에게 천거하여 삼사좌사응양군상호군(三司左使應揚軍上護軍)에 제수하여 8위(衛) 42도부(都府)의 병권을 장악하게 했다. 군부를 장악한 신돈은 정권을 잡기 위해 암중모색(暗中摸索)하던 행보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3월 어느 날.

마침내 신돈은 군부의 실력자 최영을 실각시키기 위한 모의에 착수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예. 대사님!”

방문이 열리자 집안을 호위하는 경호대장이 대청마루에 부복했다.

“김원명 대장군을 들라 해라.”

얼마 후 김원명이 헐레벌떡 숨이 턱에 닿을 듯이 신돈의 집으로 들어왔다.

“대사님, 부르셨습니까?”

“상의할 일이 있소이다. 옛말에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소.  좀 더 가까이 다가오시오.”

단 둘이 앉게 되자 신돈은 최영을 거세할 비책을 귀엣말로 김원명에게 설명했다.

“대장군, 이달 2일에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였소. 금상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찬성사 최영을 동서강 도지휘사로 임명하여 동강(임진강)으로 출진(出鎭)시켰소. 김 장군은 날랜 무사 30명을 뽑아 왜적으로 가장하여 개경 근교의 창릉(昌陵, 세조의 능)에 난입하여 비각에 불을 지르고 세조(世祖, 태조 왕건의 아버지)의 영정을 없애 버리시오. 그리고 반드시 왜구가 침입했다는 흔적을 남겨야 하오.”

“대사님, 정말 탁월한 생각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일거양득, 일석이조가 따로 없습니다. 분부 차질 없이 받들겠습니다.”

신돈은 최영에게 치명상을 주어 제거하는 첫 단계를 시작한 것이다. 김원명은 바짓가랑이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니며 수하 불한당들을 움직여 신돈의 비책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튿날 아침. 조회에서 김원명은 공민왕에게 상주했다.

“전하, 간밤에 왜구 수십 명이 창릉에 침범하여 세조의 영정을 훔쳐가는 등 분탕질을 쳤다 하옵니다. 황공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뭐라고? 도대체 왜구들은 어디로 침입해 왔단 말이냐?”

“강화도를 통해 침입했사옵니다.”

“최영 장군이 방비하고 있는 곳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당장 최영을 불러라.”

급보가 날아갔다. 일기가 고르지 않아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봄날 저녁 무렵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최영은 말을 달려 허겁지겁 입궐했다.

“전하, 찾아계시옵니까?”

“최 장군은 대체 왜구를 막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소?”

“물샐틈없이 왜구를 방어하고 있사옵니다.”

“뭐라고!”

공민왕은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연상을 내리치며 최영을 노려보았다.

“물샐틈없는 방어가 되었다면 어떻게 왜구가 창릉까지 침입할 수 있었겠소? 여봐라, 당장 최영을 삭탈관직하라! 그리고 그 자리를 김속명(金續命, 명덕태후의 인척. 김원명의 동생)이 대신하게 하여 왜구의 개경진입에 대비하라!”

공민왕은 용상에서 벌떡 일어나 편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구국의 영웅을 의심하는 변덕을 부렸다. 최영은 변명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청천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공민왕, 요승 신돈을 왕사로 발탁

그해 5월. 마침내 정치도박이 시작되었다.

공민왕은 자신을 뒷받침해오던 측근 세력인 정세운, 홍언박, 김용 등이 모두 제거된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무명의 요승 신돈을 파격적으로 왕사(王師)로 발탁한 것이다. 노국공주가 죽은 지 꼭 석 달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신돈은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편전에 부복했다.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공민왕은 결연한 눈빛으로 신돈의 두 손을 덥석 움켜잡고 말했다.

“과인은 결심했소, 대사! 날마다 대사와 더불어 국사를 논하고 싶소. 대사를 왕의 사부로 모실까 하는데 대사의 생각은 어떻소?”

“전하, 망극하옵니다. 소승은 범부로 지존의 몸이신 제왕의 사부가 될 자격이 없사옵니다. 그러니 하명을 거두어주시기 바라옵니다.”

“대사, 주나라 문왕은 위수 강가에서 강태공을 만난 뒤에 스승으로 삼아 천하를 통일했소이다. 대사는 욕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친당(親黨)이 없어 국사를 맡길 만하오. 그러니 과인을 도와주시오.”

거듭되는 공민왕의 요청에 마지 못하는 척 신돈은 응했다.

“전하, 소승의 미천함을 개의치 않으시고 그토록 믿어 주시니 하해와 같으신 은혜를 어찌 감당할지 두렵사옵니다. 소승 신수이처(身首異處)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의 견마지역(犬馬之役)을 다하겠사옵니다.”

“대사, 고맙소이다.”

순간 신돈의 뇌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바로 자신을 참소하는 신하들에 대한 영구적인 방비책이었다.

“전하, 그런데 소승이 국사가 되면 반드시 참소하는 신하들이 있을 것이옵니다. 소승이 듣기로는 옛말에 ‘국왕과 대신은 참소와 이간하는 말을 쉽게 믿는다’고 하오니, 이와 같은 일이 없어야 세상에 복과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과인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참소하는 자들은 임금의 권도(權道)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래도 믿지 못하겠거든 여기 글을 써서 맹세를 남기리다.”

공민왕은 ‘나는 스승을 구하고, 스승은 나를 구하니, 천지신명께 맹세코 변치 않으리라’ 라는 맹세의 글을 손수 써서 신돈에게 건네주었다.

용의주도한 신돈은 배사(拜謝)하고 편전을 물러나왔다.

‘아아, 일구월심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가. 이 순간이 정녕 꿈이 아니길…….’

신돈은 자기 살을 꼬집었다. 지난 7년간의 공민왕과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이세독립지인(離世獨立之人)’으로 공민왕의 개혁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신돈이 왕사로 발탁되자 왕사 보우스님은 공민왕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뒤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로 들어갔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신돈을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

이 소식은 도성 안은 물론 전국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신돈이 왕의 사부가 되고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졌다네. 그 때문에 보우스님이 왕사 자리를 버리고 자취를 감추었다네.”

“신돈이 왕사로 봉해지는 날 개경 주변에 지진이 일어났다네. 이는 필시 나라에 큰 재앙이 들 징조 아니던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듯이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말은 초여름 바람을 타고 수철동 이제현의 집에까지 전해졌다.

이제현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천추의 후회를 남기는 법이다. 그는 팔십이 다된 노구를 이끌고 대궐로 향했다. 국구(國舅)로 대궐에 드나드는 것이 볼썽사납다고 생각하고 조정행사 이외에는 좀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은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된 까닭에 대궐행이 새삼스러웠다.

공민왕은 갑작스런 이제현의 입궐 이유가 궁금하다는 투로 인사를 했다.

“장인어른, 어인 일이십니까? 요즈음 거동이 불편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의를 보내드렸는데…….”

“전하,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감읍 드리옵니다. 이렇게 기력을 조금 회복하여 전하의 용안을 뵙게 되어 감개무량하옵니다.”

“장인어른의 건강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제현은 임금의 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십여 년 전에 임금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던 스승의 자격으로 간언했다.

“전하, 그 옛날 소신이 전하께 주돈이(周敦, 북송의 주자학의 비조)의 통서(通書)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기억나시옵니까?”

“예, 그렇습니다.”

“주돈이는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병을 감싸 안아 숨기면서 의원을 기피해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護疾忌醫 호질기의)’고 가르쳤습니다.”

“…….”

“전하, 신돈을 임금의 사부로 결정하셨다는데, 그 사람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하셨는지요?”

“그는 세속이나 물욕에 초연하고 붕당으로 연결된 정치 기반이 없는 인물입니다. 국난이 있을 것도 미리 예견하여 맞추지 않았습니까.”

“전하, 그 사람은 불학(佛學)을 하는 스님이 아니라 풍수를 하는 점술가입니다.”

“…….”

“제왕의 사부는 탁월한 경륜과 덕망을 갖춘 인격자를 요구합니다. 전하께서 즉위  후 지금까지 하신 정동행성 폐지, 쌍성총관부 회복, 북벌단행 등의 개혁정책들은 고려의 군관민(軍官民)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일이지 풍수가가 얘기하는 어떤 길조나 우연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옵니다. 따라서 향후 고려의 재건을 위해서는 청렴한 신진 사대부들을 등용하여 조정에 새바람을 일으켜야 하옵니다. 신돈의 요언은 전하의 밝으신 성총을 흐리게 만들 뿐이옵니다. 신돈의 참언으로 기울어 가는 고려의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노신이 살면 앞으로 몇 년을 살겠습니까. 노신의 마지막 간언을 너무 가벼이 여기지 마시옵소서. 신돈을 사부로 맞이하신다는 결정은 철회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장인어른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공민왕은 장인의 면전에서 차마 ‘신돈을 내칠 수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도 임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제현의 간언도 공민왕에게 소귀에 경 읽기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죽음을 몇 년 앞둔 노 정치인의 애절한 충간을 공민왕은 외면했다. 그것은 고려의 불행이자 공민왕의 불행이었다. 더욱이 그 일로 인해 공민왕 자신이 죽음을 재촉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후 공민왕은 신돈에게 국정운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고 조신들을 견제토록 했으며, 자신은 노국공주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만 전념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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