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내 반입금지’ 불온서적 판결, 12년 만에 나와

국방부가 지난 2008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책들. [뉴시스]
국방부가 지난 2008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책들.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지난 2008년 국방부로부터 불온서적으로 지정돼 ‘군내 반입이 금지’된 책의 출판사‧저자의 소송이 제기된 지 12년 만에 배상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일부 승소한 출판사‧저자들은 국방부에 시정과 대국민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국방부가 대응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소송 전말에 대한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이다.

출판사‧저자들, ‘국가 상대’ 손배소 일부 승소

국방부, 대응 방안 모색 중···공식 사과 진행될까

최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판사 설범식)는 김진숙, 홍세화 씨 등 저자 14명과 후마니타스 등 3개 출판사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고 각 원고에게 200만~500만 원 상당의 배상액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국방부의 지시는 일반 공공장소가 아닌 군부대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사상이나 의견 전파를 제한하는 경우로, 헌법이 금지하는 사전검열로는 인정되지 않는다”면서도 “서적에 나타난 사상이나 의견 등 내용을 문제 삼아 반입을 금지하는 공권력 행사는 그 대상이 현역 장병에 국한되더라도 원고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밝혔다.

이어 “불온서적이라는 표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명예훼손적 또는 모욕적 표현에 해당한다”면서 “‘핵과 한반도’ 등 3권의 경우 불온서적 지정이 국방부 장관의 권한 범위 내에서 이뤄져 위법이라 볼 수 없으나 나머지 서적들까지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것은 원고의 외적 명예를 침해한 위법행위”라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국방부 측에서는 이 지시와 원고들의 손해 사이 인과관계가 없고, 고의나 과실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며 “국방부 장관 등이 지시에 앞서 충분한 심사를 거쳤다고 볼 수 없는 이상 나머지 서적들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행위에 과실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후 정부가 지난 8일 이의신청 또는 상고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됐다. 소송이 제기된 지 12년 만이다.

대법원, 서울고법에 사건 환송

“오히려 양질 교양도서 포함”

앞서 국방부는 지난 2008년 21개 출판사의 23개 대중 교양서적‧문학작품을 불온서적으로 규정하고 군부대 반입을 차단하는 금서조치를 내렸다.

불온서적이 된 도서는 ‘북한의 미사일 전략’, ‘북한의 우리식 문화’, ‘지상에 숟가락 하나’, ‘역사는 한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통일 우리 민족의 마지막 블루오션’, ‘핵과 한반도’ 등이다. 이 도서들은 북한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불온서적으로 지정됐다.

또 반정부‧반미 분야로는 ‘미군 범죄와 SOFA’, ‘우리 역사 이야기’, ‘소금꽃 나무’, ‘21세기 철학이야기’ 등이 불온서적으로 분류됐다. 반자본주의 분야로는 ‘세계화의 덫’ 등이 포함됐다.

이에 출판사와 저자들은 지난 2008년 10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지난 2012년 1심에서 기각, 2013년 2심에서도 기각을 결정했다.

1심과 2심은 “국방부 장관의 행위가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거나 업무 방해‧재산권 침해 등의 위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지시 역시 직무수행의 재량권 범위 내에 속한다”며 국방부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018년 대법원이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서울고법에 사건을 환송하면서 재조명됐다.

대법원은 “이 책들은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해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 일반에서 양질의 교양도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책들도 포함돼 있다”며 “불온서적에 해당하지 않는 서적들까지 일괄해 지정한 조치는 위법한 국가작용”이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낸 것이다. 이후 소송 12년 만인 지난 8일 최종 판결이 나왔다.

3건은 불온서적 인정

출판계 “면죄부 준 것”

출판사와 저자들은 판결을 두고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이 출판사와 저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번 최종 판결에 대해 환영을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핵과 한반도’,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 ‘북한의 미사일 전략’ 등 불온서적 지정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서는 “불온 여부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이 정당했다는 면죄부를 준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잘못된 판결”이라며 “도서를 집필하고 펴내는 저자와 출판사는 물론,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앞으로 중대하고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그러면서 국방부가 불온서적 목록 작성을 중단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불온서적 지정을 두고 저자와 출판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물론, 유통을 차단하려 했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선택의 자유마저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누리꾼들은 “이건 (불온서적 지정) 당시 정부 관계자들이 물어내야 할 것”, “당시 국방부 덕분(?)에 정말 훌륭한 책들을 알게 돼서 대부분 사서 읽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국방부 지정 불온도서 목록 중에는 2007년 문화관광부 추천도서로 선정된 도서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후퇴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국방부는 이번 판결 관련 여론을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대응 방향을 모색 중이다. 향후 출반계의 반발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관측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