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짧은 전쟁이었다. 불과 2개월. 청나라 군대가 1636년 12월2일 압록강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된 전쟁은 다음 해인 1637년 1월30일에 삼전도에서 조선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망가진 조선은 청과의 전쟁을 통해 회복하지 못할 타격을 입었다. 

엄청난 공물을 전쟁배상금 형식으로 바쳐야 했고,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갔다. 척화파 강경론자들이 처형되었고,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60만 명의 조선 백성이 노예로 팔려 나갔다.

청나라는 잔인했다. 전쟁 와중에 붙잡은 ‘피로인’이라 불린 조선 백성들을 다시는 조선 땅을 못 밟는 신세로 만들었다. 청나라 군대는 전쟁을 벌이면서 돈벌이로 또는 노예로 부리기 위해 수많은 조선 백성을 사냥했다. 

청은 조선에 항복을 받으면서 이들 조선 백성이었던 노예들이 도망쳐 다시 조선 땅을 밟을 경우 조선이 이들을 붙잡아 송환할 것을 강요했다. 돌아갈 나라를 잃은 이들은 더 이상 조선 백성이 아니었고, 백성을 돌보지 못한 조선은 더 이상 나라도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노예 주인에게서 탈출해 압록강에 닿아도 조선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조선 군사들은 국법이라며 탈출해 귀국하려는 이들을 막았고, 조선 백성들조차 처벌받기를 두려워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게 막았다. 강 건너 조선 땅을 밟지 못해 비통하고, 자신들을 외면하는 조선 군사와 백성들의 행태가 분통해 통곡하다 목을 매는 이들이 속출했다. 강변마다 고국에 버림받은 유골들이 허옇게 널려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전쟁은 모든 사람의 삶을 파괴하지만 특히 여자들은 더욱 비참한 처지에 빠진다. 병자호란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참했다. 남자들이야 청군을 피해 피난 갈 기회라도 있었지만 사대부집 여성들은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할 처지로 내몰렸다. 병자호란 막바지 강화도가 함락되었을 때 강화도 앞바다에는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연못 위의 낙엽처럼 떠 다녔다. 스스로 죽지 못한 여자들은 강제로 자살을 당하기도 했고, 용케 살아남으면 청군에게 납치되고 강간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들은 환향인(還鄕人)으로 불렸다. 여자들은 환향녀(還鄕女). 고국에 돌아온 이들 중에 남자들은 어려웠던 지난날을 훌훌 털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제는 여자였다. 청나라 군대나 노예 소유주의 손을 타 정조를 잃었다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이혼 당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많은 남자들이 돌아온 아내를 외면하고 다른 여자를 찾아갔다. 다시 버려진 여자들은 ‘화냥년’이 되었고 그들이 낳은 자식은 ‘호로자식’으로 불렸다.

사소한 것까지 꼼꼼히 기록했다고 상찬을 듣는 조선왕조실록에는 ‘환향인, 환향녀’란 단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자신들의 무능을 들키는 게 두려워서였을 수도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사를 애써 잊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부끄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이기는 했을 것이다. 전쟁 중에 타국에 납치되어 갔다 겨우 살아 돌아온 백성을 욕하고 비난하는 자신들의 행태가 부끄러운 줄은 알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우한폐렴이라고도 불리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와중에 중국 우한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들을 전세기로 데려오기로 했다. ‘안 그래도 되지만’ 혹시 모를 감염 위험을 막기 위해 14일간 격리하기로 했다.

그걸 막는 사람들, 조장하고 선동하는 언론들, 이용해 먹는 정치인들은 나중에라도 부끄러운 줄 알 수나 있을까. 중국 우한에서 돌아오는 우리 국민들은 원성을 사고 그걸 막으려는 국민들은 뭐라고 불리게 될까. 그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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