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여 년 동안 현역 정치인 중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만큼 부침(浮沈)과 우여곡절(迂餘曲折)을 많이 겪은 정치인도 드물다. 2006년 경기도지사 임기를 마치고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선 그는 덥수룩한 수염의 초췌한 모습으로 민초들과 어울리며 막걸리를 들이켰고, 산으로 들로 그리고 막장으로 향했다. 그의 정치적 내공(內功)은 그렇게 축적되기 시작했다.

2007년 대선의 해를 맞아 자신이 소속됐던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고자 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로 양강 구도를 굳힌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하는 것이 정치적 패착임을 직감하고 3월19일 한나라당을 탈당하게 된다.

그의 한나라당 탈당 기자회견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저는 오늘 한국 정치의 낡은 틀을 깨뜨리기 위해 저 자신을 깨뜨리며 광야로 나섭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심정으로 새로운 정치질서 창조의 길에 저 자신을 던지고자 합니다.”

당시 한나라당 경선후보 중 가장 앞서가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그의 탈당 2주일 전인 3월 5일 충북지역 기자간담회에서 “손 전 지사는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밖으로 나가도 추운 곳으로 나가는 것”이라며 도발했다. 이에 격분한 그였지만, 결국 그는 이명박 후보의 세 치 혀의 위세에 눌려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곳으로 자진하여 나갔다. ‘100일 민심대장정’으로 축적된 정치적 내공이 내공(內功)이 아닌 내공(內空)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그는 정치적 대공황의 시기였던 2007년 당시까지 그가 속해 있던 정치적 진영과는 정반대의 진영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혈혈단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진영에 안착했고, 대선후보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7년 대선에서 역대급으로 참패한 민주당은 그에게 당의 수습을 맡겼고, 그는 2008년 총선을 통해 계파를 거느리는 당대표로 거듭났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실력으로 민주당을 접수했고, 이듬해에는 국회의원 배지까지 달면서 그가 향했던 곳이 결코 시베리아 벌판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의 내공(內功)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가 재건한 민주당의 원주인은 그에게 탄탄대로를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에 맞춰 폐족으로 자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식솔들이 하나둘 당으로 돌아와 너무나도 쉽게 당권을 장악했고, 장악한 당권은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 불과했던 초선 의원 문재인을 대선후보로 만들어 냈다.

이 과정에서 손학규는 철저하게 들러리를 섰으며, 그의 진영 내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철수의 등장은 그가 차지하고 있던 비좁은 정치적 공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내공(內功)이 다한 그는 만덕산(萬德山)으로 향했다. 만덕산은 그가 내공(內功)을 키우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다.

이후 쫓겨나다시피 민주당을 나왔고, 만덕산을 수시로 드나들며 수행에 열중했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겨우 2018년 지방선거 후 바른미래당의 당대표가 되었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갖은 수모와 비난을 참아내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다. 실패한 정치가가 늘 그렇듯이 그의 정치적 행보는 노욕에 물든 행보로 비춰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만덕산에서 쌓은 내공(內功)이 있었다. 100억이 넘는 정당국고보조금도 쥐고 있었다. 수모를 참은 이유다. 그런 그가 ‘대안신당, 민주평화당과의 통합을 추진하고, 미래세대에 문을 열어 미래세대가 새로운 정치의 중심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강조했다. 만덕산 수행의 모든 내공(耐空)을 쏟아 붓고 있는 중이다.

70여 일이 지난 후, 그의 정치적 내공(內功)이 결코 내공(內空)이 아니었음이 증명될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은 나만의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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