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90]
삼 불 망(三不忘) - [90]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20-02-10 13:52
  • 승인 2020.02.10 13:55
  • 호수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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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최영의 삭탈관직과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그해 5월 을축일.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삼고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신돈의 측근인 김보(金普)와 이춘부(李春富)를 도첨의찬성사로, 임군보(任君輔)·김란(金蘭)·박희(朴羲)를 밀직부사로 봉하였다.

찬성사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켰으며, 염제신 등의 권신, 경복흥, 이인복(李仁復), 이구수(李龜壽)를 비롯한 문신들을 줄줄이 숙청했다. 또한 공민왕의 측근인 찬성사 유숙, 홍건적 2차 침입에서 큰 공을 세운 평리 한방신을 2선으로 퇴진시켰다. 신돈이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가 된 뒤 인사권을 포함한 강력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백관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으며, 그가 출입할 때는 왕과 같은 의례가 행해졌다.

공민왕이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킨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온 나라의 민심은 크게 동요하였다.

“무수한 전공(戰功)을 세운 고려의 영웅이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쫓겨나다니, 그러고서야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누가 아니래, 최영을 모함에 빠뜨려 조정에서 몰아낸 괴수는,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신돈이라는 돌중이라면서?”

“중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국왕이 거기에 놀아나고서는 나라가 무사할 리가 없을 걸세.”

온 나라 백성들은 어디서나 모여 앉기만 하면, 저마다 이와 같은 쑥덕공론을 주고받았다. 장안에 신돈을 비방하는 쑥덕공론이 퍼져 돌아가는 것을 알고,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김원명이었다.

최영이 지방으로 좌천되도록 만든 자는 신돈과 김원명 단 두 사람인데, 백성들은 그런 비밀을 공공연하게 퍼뜨리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절대 비밀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김원명은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삭탈관직 당한 최영은 실의에 빠져 망연자실했다.

‘아아, 고려 사직을 위해 수많은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돌아온 것이라고는 요승의 계략에 의한 삭탈관직이란 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넋두리를 한 최영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울분을 억누를 길이 없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 준 이제현의 수철동 집을 찾았다. 이 때 이제현은 고질적인 천식으로 몸이 조금 야위어 있었다.

얼굴이 상기되어 달려온 최영이 인사를 올렸다.

“시중 어르신, 천식으로 몹시 고생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그동안 살만큼 오래 살았고 앞으로 살날이 많지 않네.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하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니 기침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지네. 그러나저러나 자네의 안색이 좋지 않구먼.”

“…….”

이제현은 최영이 찾아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던 터라 최영에게 그간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대해 위로하는 말을 건넸다.

“최 장군, 금상은 자신의 측근인 유숙을 읍참마속(泣斬馬謖)으로 퇴진시켰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어르신, 신돈이 전권을 쥐고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전정비를 해준 고육지계(苦肉之計)라고 봅니다만…….”

“잘 보았네. 금상은 정치적 권모술수에 밝은 분이네. 따라서 요승 신돈의 발호도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네. 신돈도 결국은 조일신, 기철, 김용과 같이 토사구팽(兎死狗烹) 되고 말 것이야.”

“…….”

이제현은 최영에게 스스로 경계하는 가르침도 잊지 않았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조식(曹植, 조조의 아들)의 시구에 ‘높은 나무일수록 거센 바람을 받게 된다(高樹悲風多 고수비풍다)’라는 구절이 있네. 이는 공적이 크면 클수록 심한 시기를 받게 된다는 철리(哲理)를 노래한 것이네. 최 장군은 지금까지 조정에서 오인택(吳仁澤)과 함께 정권을 좌지우지한다는 세인들의 평가를 받아왔네. 금상은 그런 최 장군이 부담스러웠던 거야. 아마도 이번 신돈의 참소로 자네는 삭탈관직에 그치지 않고 귀양을 가게 될 수도 있을 걸세. 그러나 절대 절망할 필요는 없네. 누구에게나 인생에 한번쯤 시련은 찾아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경거망동은 금물이네.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면 최 장군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도래할걸세. 먹구름이 지나가면 해가 반드시 다시 뜬다는 철리를 잊지 말게. 세월은 돌고 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법이니까.”

“잘 알겠사옵니다.”

“‘한때의 분한 것을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忍一時之憤, 免百日之憂 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는 경행록(景行錄)의 구절이나, ‘의지하고 기댈 것은 자기 자신과 진리밖에 없다(自歸依 法歸依 자귀의 법귀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게나.”

“예, 시중 어르신. 미욱한 소장에게 높은 가르침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최영이 이제현의 집을 나서자 신의 조화인지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어느덧 맑게 개어 있었다. 흐렸던 최영의 마음은 전에 없이 원기가 살아났다. 최영은 이제현의 직관력과 예측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면 최 장군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도래할걸세’라고 말한 이제현의 말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였다.

한편, 이야기는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신돈은 열네 살 이전의 어린 소녀와 동침을 하여 그 몸에 배어 있는 기운을 받아들이면 그보다 좋은 약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닥치는 대로 소녀 성사냥을 했다.

이 때문에 유학자 이원충의 말이 세간의 화제가 되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신돈의 주색은 도를 넘치고 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의 빈대도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신돈이 딱 그 짝이다.”

이 무렵, 또 다른 소문이 개경 장안에 퍼져있었다.

“밀직부사 김란(金蘭)이 두 딸로 하여금 신돈의 잠자리를 돌보게 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최영은 김란을 크게 꾸짖었다.

“어찌 자신의 딸을 둘씩이나 요승에게 바치는가? 권세가 그토록 탐이 나는가?”

“…….”

김란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신돈은 구원(舊怨)이 있는 최영에게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가 마침내 정치보복을 자행한 것이었다.

며칠 후. 최영은 이제현의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뼈 속 깊이 새기며 한마디 말을 남기고 즉시 임지로 떠났다.

오늘날 죄 지은 자로서 몸을 보전하는 이가 적은데, 나는 계림윤이 되어 가니 이것 역시 전하의 은혜로다.

그러나 신돈은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킨 것만 가지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최영을 살려주는 것은 사냥꾼이 포획한 맹호를 다시 숲으로 돌려보내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예 최영을 귀양 보내고 궁극적으로는 살해하려는 계획을 갖고 다시 참소를 했다.

“최영이 이구수·양백익·석문성·박춘 등과 내신 김수만과 결탁하여 상하를 이간하고, 현량(賢良)을 배척해 내쫓는 큰 불충을 저질렀사옵니다.”

공민왕은 신돈의 참소에 화답하여 신돈의 측근 이득림(李得霖)을 계림(경주)으로 보내 최영을 국문하게 했다.

최영은 자기 자신을 위한 변명은 일체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으로 자백하며 이득림을 다그쳤다.

“빨리 형을 집행하라!”

주객이 전도된 격이었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경상도순무사 정사도(鄭思道)는 최영을 비호했다.

“찬성사 최영에게는 아무 죄가 없으니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정사도의 정의로운 외침에 하늘도 감복한 것일까. 갑자기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게 몰려오더니 천둥·벼락이 휘몰아치고 난데없는 우박이 온 계림 천지를 뒤덮는 것이었다. 이 뜻밖의 변괴에 혼비백산한 이득림은 최영을 사죄(死罪)로 엮어 죽이려 한 신돈의 계획을 완수할 수 없었다.

결국 신돈은 정사도를 파직하고, 최영을 삭탈관직하고 가산을 몰수한 뒤 귀양 보냈다. 최영에게 내려진 형량은 조작된 사건의 무게보다 훨씬 무겁게 내려졌다.

최영이 시련의 세월을 겪는 동안, 신돈은 오인택, 조희고 등 많은 공신들을 유배시켰고, 강력한 무장세력들을 거세하고 새로운 권력을 재편성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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