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뉴시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일본이 ‘앞으로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북한이 추진하던 6개년 경제계획을 지원하려고 했다”

▲ 그리고 백지 상태의 북한에 대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조율하려고 하는 자세가 보였다. 그 일례로 사회당 출신의 미노베 료키치 도쿄도지사가 1971년에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을 만난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일본의 사회당이지만, 넓은 의미의 일본 정부 자치단체의 장이 우리의 적대국인 북한에 가서 조율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다. 1971년 12월에는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이 발족을 한다. 자민당·사회당·공명당·민사당·일본 각 정당 의원들이 북한과의 관계 우호 촉진을 위한 의원연맹을 결성하는 일이 있었고, 일본에서 북한에 공장을 수출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북한이 그때 추진하고 있던 6개년 경제계획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이 공장 수출을 계획하니까, 우리는 맹렬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더한건 기무라 도시오 외상대리가 “앞으로는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하겠다”는 이야기를 언론에 밝히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1971년 7월에 미국 헨리 키신저 안보담당 보좌관이 베이징을 방문한다. 그 후 1972년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에 가서 미·중 국교정상화를 꾀하게 된다. 일본 사람 스스로도 그때 ‘닉슨 쇼크’라고 했다. 그런 엄청난 충격의 여파가 펼쳐질 때다. 그래서 동북아과장 입장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면 “또 무슨 일이 터졌나” 싶은 일들이 많았다. 이렇게 일본의 대북 접근이, 또 북한의 대일공작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뤄질 사태가 한·일 관계의 한 측면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1972년에 해외로 나가게 될 때, 북한 문제가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서 호주로 가려고 했다. 그때 윤석헌 차관이 저를 불러서 그동안에 고생 많이 했으니까 원하는 곳에 보내준다고 이야기하는데, 나갈 데는 호주하고 캐나다밖에 없었다. 그런데 캐나다는 미국의 뒤를 따라 그때 마침 지금의 중국인 중공과 국교정상화를 했다. 그러면 그에 뒤따라 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주로 갔다. 그런데 호주에 가서는 그야말로 정통으로 당했다.

 -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니, 그 여파로 결과적으로 한·일 관계가 경색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나 하는 말씀을 해주셨다. 1971년 7월에 미국이 중공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 ‘닉슨 쇼크’를 안겼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큰 위기로 다가왔을 것 같다.

▲ 그렇다. 특히 안보상으로 1969년 닉슨독트린이 있었다. 그 후 1971년쯤에 미 7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했다. 안보상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시점이었다.

- 1969년에 닉슨 정부가 들어서고, 당시 한국은 미군 철수 문제에 대해서 경계를 했었다. 당시 일본의 사토 정부가 한국의 안보위협에 대해서 배려를 했던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1971년 되면서 미국과 중공의 관계가 전면적으로 개선되는 방향으로 확정적인 보도가 나오니까, 일본이 북한과의 대결보다는 화해무드로 가야 한다는 식의 입장을 내놓기 시작하면서 한·일 관계 역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학자들의 실증연구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 한참 미·일 공동성명에도 한반도 조항들이 들어갈 때고, “한국의 안전은 일본 자신의 안전에 긴요하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을 할 때였다. 닉슨 쇼크가 일어나고 미국의 대중유화정책이 표면화하니, 물론 일본에서도 나름대로의 변화는 있었다. 그런데 스즈키 젠코 내각이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앞이었나?

- 스즈키 내각이 후다.

▲ 후쿠다 내각 후인가?

- 그렇다. 1980년 전후니까. 후쿠다 내각이 1977년, 그다음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 그 후에 스즈키 내각이다.

▲ 스즈키 젠코 수상이 그 후인가, 앞인가? 스즈키 수상 때 들어서서 미·일 동맹이라고, 동맹이라는 말을 써서 스즈키 수상이 불편해했다.

- 그 후다. 사토 내각 다음에 다나카. 그다음에 미키 다케오 내각, 그리고 후쿠다 내각이다.

▲ 미키, 후쿠다다. 맞다. 미키 수상 스스로도 자민당 안에서는 상당히 좌파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제가 아주국장 때입니다만, 미국에 카터 정부가 들어서서 주한미군 철수, 지상군 철수 문제들이 있었다. 후쿠다 내각 시기 일본도 이를 굉장히 적신호로 보고 카터와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래서 카터·후쿠다 공동성명을 보면 “한반도에 있어서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중요성에 유의해 계속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합의했다”는 한국 조항이 들어간다. 우리 정부는 특히 카터 대통령에 대한 후쿠다 수상의 측면 지원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지만, 후쿠다 수상이 그만둔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초청을 했는데, 재임 중에는 실현이 안 되고 수상직을 끝낸 후에 방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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