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 원구성’사령탑 홍·준·표 한나라당


18대 국회가 82일 만에 국회 원구성을 마쳤다. 원 구성을 무사히 마친 데는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역할이 컸다. 원내대표 취임일성에서 밝혔듯이 ‘통 큰 정치’와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당내 강경파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민주당에게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비판이다. 172석의 거대 여당이 80여석의 소수 야당에게 끌려 다녔다는 곱지 않은 시각이다. 하지만 여권 일각에서는 ‘그나마 홍준표라서 여야 합의로 원구성이 됐다’고 점수를 주는 이들도 적잖다. 청와대의 부정적인 기류에 맞서 감히 누가 원구성을 이끌어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18대 국회 민주당 원내대표와 진검승부 1라운드를 마친 홍 원내대표의 평가는 그래서 엇갈리고 있다.

“18대 국회에서는 단상 점거가 없는 화합의 정치를 하겠다”

홍 원내대표가 취임 초부터 입버릇처럼 해온 말이다. 외형상 홍 원내대표는 이 약속을 지켰다.


1차 원구성 합의, 靑 ‘제동’ 지도력 상처

특히 172석의 공룡 여당으로 단독 개원 부담감을 털면서 민주당을 길거리로 내몰지 않고 끌여 들였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나아가 민주당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며 생사를 건 ‘가축법’ 합의를 해주는 과정에 집권 여당의 위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여야 원구성 합의 직전 정부 측 인사의 반대 전화를 받은 홍 원내대표가 “그러기에 애초부터 쇠고기 협상을 제대로 하지”라며 일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야 원구성 합의를 거치면서 홍 원내대표가 받은 내상도 적지 않았다.

지난달 31일 홍 원내대표가 원구성 합의에 급급한 나머지 야당과 사실상 국회 정상화 방안을 합의했었다. 그러나 원혜영 원내대표의 사인까지 마친 합의안이 막판 청와대의 전화 한통으로 물거품이 돼버렸다. 홍 반장이라는 별칭이 홍일병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19일 어렵게 원구성을 마친 홍 원내대표지만 역시 당내 불만은 존재했다.

당내 일부 강경파들은 홍 원내대표를 겨냥해 ‘너무 많이 양보했다’, ‘집권 여당으로 숫적 우세의 강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독불장군식 정치를 한다’ 는 등 비판이 일었다. 가축법 개정안 합의와 쇠고기 국정조사특위 연장 동의관련해선 ‘민주당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것이었으면 82일간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느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이런 당내 분위기는 한나라당 몫의 상임위원장 3석을 놓고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반란표’로 표출됐다.

국회 관례상 집권 여당의 상임위원장은 원내 대표실에서 조정해 발표하면 통상 당내 의원들을 그대로 따라왔다. 하지만 통일외교통상위(남경필), 문화체육관광위원회(고흥길), 정보위원회(최병국) 3곳에서 경선 요구가 나온 것이다.

사실상 홍 원내대표가 내정한 인사들에 대해 불만이 경선으로 불거진 셈이다. 통외통위에는 박진, 문광위에 정병국, 정보위는 권영세 의원이 각각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나라당 172명 가운데 156명이 참가한 이날 경선 결과는 박진, 최병국 의원이 승리를 했고 남 의원은 6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무엇보다 정보위 권영세 의원은 같은 78표 동수를 얻어 ‘연장자 우선’ 규정에 따라 최 의원이 간신히 정보위 위원장을 할 수 있었다. 사실상 홍 의원의 위상에 생채기를 남겼다.


‘나홀로 정치’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실험

한나라당의 안티 홍준표 정서 배경으로 당내에서는 홍 원내 대표의 개인적인 정치 스타일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홍 원내대표의 인생 역정을 보면 그동안 ‘대화와 타협’이나 ‘화합형 정치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홍 원내대표가 검사시절 1988년에 검찰 고위층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직 대통령 측근 비리를 수사해 검찰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 93년에는 슬롯머신 사건 수사로 현직 고검장급 검사장을 구속시켜 급기야 사표를 내기에 이르렀다. ‘모래시계 검사’라는 호평 뒤에 ‘돈키호테’, ‘독불장군’이라는 상반된 별칭이 상존하는 이유다.

검찰 조직에서 따돌림을 받은 이후 1996년 YS에 의해 신한국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정계 입문 뒤에도 한동안 밥을 비서에게 시켜 식당에서 가져와 혼자 의원회관에서 밥 먹을 정도로 사람들이 그를 꺼려했다. 아직도 홍 의원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홍 의원의 이런 ‘나홀로 정치’는 김대중 정부 시절 정권의 비리를 잇따라 폭로하는 등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홍 원내대표가 변신을 시작한 것 역시 4년 전인 17대 국회에 들어서부터다.

2005년 국적법과 재외동포법 발의는 보수 정당에 있으면서 보수 세력의 어긋난 특권의식을 파헤친 법안들이다. 2006년에는 진보 정당에서조차 군침을 삼켰던 반값 아파트 공약을 내세워 서민을 위한 행보를 가속화했다.

지난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는 이명박 후보나 박근혜 후보를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서 양 진영의 갈등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4선의 국회의원으로 당내 전략기획위원장, 혁신위원장, 환경노동위원장을 맡아 능력을 입증한 홍 의원은 경선 없이 단독 출마해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로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물론 친박 친이 어느 진영에도 줄을 서지 않은 홍준표식 정치가 빛을 발한 순간이기도 하다.

원구성 합의에서 보여주듯 그동안 ‘독불장군’, ‘저격수’ 이미지를 털고 ‘화합형 이미지’를 심기위해 야당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곱지 않은 시각이 나오는 배경이다. ‘대화와 타협 정치’를 강조하는 홍준표식 정치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 정치권은 예의주시하고 있다.


#홍준표 프로필
▶1954년 경남 창녕생
▶영남고 졸
▶고려대 행정학과
▶사법고시 24회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국가안전기획부 국제범죄조직 및
마약수사팀 수사지도관
▶15·16대·17·18대 국회의원(4선)
▶한나라당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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