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됐으면 했던 정치인 중에 홍사덕이 있었다. 홍사덕 전 의원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5선 국회의원과 정무장관, 국회부의장, 민화협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시절에는 기자가 재야인사와 몇몇 전문직과 함께 정치권 단골 영입 직종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특히 홍 전 의원은 당시 여권에 편승한 것과 달리 야당을 택했기 때문에 많은 선·후배들로부터 격려와 지지를 받았다.

홍사덕 전 의원의 해박함과 정곡을 찌르는 분석과 대안, 간단명료하지만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 여기에 국가 미래 비전과 악마도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함은 필자가 만나 본 정치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다.
 자신을 비난하는 것보다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고 정치를 농단하는 세력에 대해 눈에서 불꽃이 터질 만큼 분노했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홍사덕 의원의 깊고 깊은 속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1997년 김대중 총재 비자금파동 때다. 

당시 홍사덕 의원은 무소속으로 김영삼 정부의 마지막 ‘정무장관’을 맡아 ‘중립적 정치 담당 공무원’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정회의조차 안 가고 당사에 있던 정무장관실도 폐쇄했다. 정무장관직을 정치를 공작하고 관리하는 장관이 아니고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치권과 국민 여론을 정확히 전달하는 자리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15대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터져나온 김대중 총재 비자금 폭로는 대선정국을 요동치게 했다. 박빙의 경쟁을 거듭하던 신한국당은 승부를 가를 결정타로 보고 총력 공세를 펼쳤고 국민의 측은 김영삼 대통령의 과거 정치자금 폭로로 맞불을 놓아가며 막는 데 급급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수사 착수’ 의중만 밝혀도 대선 결과는 크게 달라질 상황이었다.

활활 끓는 불가마 정국일 때 장관실에서 차를 한잔했다. 불러서 갔는지, 찾아갔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오후 3시경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가볍게 ‘비자금 파동’에 대해 물었다. 홍 장관은 짧은 신음소리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안경을 벗어 닦아 쓴 후에  “장공(그는 기자를 부를 때 ‘공’ 자를 붙였다)은 어떻게 생각해요” 물었다. 간략히 시중 여론과 내 생각을 말했다. 홍 장관은 “옳지 않아요. 옳지 않아. 정치를 검찰이 대신하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들어 비서에게 ‘시간이 되시는지 알아봐 줘요’라고 지시했다. 

홍 장관은 잠시 후 비서가 준비됐다는 보고를 하자 일어나면서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지금 올라가서 말씀드릴 겁니다’라고 말했다. 필자가 우문을 했다. ‘뭐라고…….’하자 홍 장관은 내 어깨를 탁 치며 “기다려봐요. 곧 뭐가 있겠지”라고 장관실을 나갔다. 그 후 김영삼 대통령은 홍 장관을 통해 ‘수사 불가’ 입장을 밝혔고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 15대 대통령이 됐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 강민석 청와대 신임 대변인은 “대통령의 말뿐 아니라 마음까지 전달하고 싶은 게 각오이며 목표”, “성공한 정부야말로 국민의 성공이며, 그러한 성공 정부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고 싶었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정치 선진국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일이니 기자가 청와대로 ‘직행’한 것을 뭐라고 할 수 없다. 우리 현실이 기자질로만 평생 살 수 없는 환경이고 정당의 대표와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조금 몇 억 더 받겠다고 양아치 짓을 서슴지 않으니 뭐라 하겠나. 한때 안면이 있었던 만큼 성공하길 기대할 뿐이다. 그래서 한마디 하자면 선배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팩트(fact), ‘팩트 있는 대변인’이 되길 기대한다. 

팩트가 힘이 있다. 국민을 감동시키고 통합시키는 것, 그리고 강 대변인의 희망대로 성공하는 정부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싶다면 전하는 ‘대통령의 말과 마음’에 팩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팩트가 직전 대변인처럼 지시사항이라는 ‘사실’을 전하는 대독(代讀)여서도 안 된다. 또 그 전전 대변인처럼 ‘당파적 사견이 사실’이라고 흥분해서도 안 된다. 

강 대변인이 선택해야 하는 팩트는 ‘거짓이 없는 사실’ 즉 진실이 담긴 팩트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걱정된다. 지금 문재인 정권을 대변하는 것은 퇴임 이후 ‘난 그때 사실인 줄 알았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 암살의 염석진 역을 맡은 배우 이정재의 마지막 대사는 이랬다. “해방될 줄 몰랐지. 해방될 줄 알았다면 밀정을 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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