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제자리걸음, 발전전략 세워야"


양세훈 전 노르웨이 대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유명인 아닌 유명인이다. 36년간 공직에 몸담으며 오랜 시간을 외교관으로 지냈다. 양 전 대사가 47개국을 누비는 동안 전 세계 각지에 그를 아는 사람이 생겨났다. 특히 일본에서 양 전 대사는 확실한 유명인이다. 그의 저서 ‘장춘에서 오슬로까지(일본어판 제목: 어느 한국 외교관의 전후사)’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꾀나 유명한 책이다. 일본 방송국에서도 이 책과 관련, 양 전 대사를 여러 차례 취재해 갔다고 하니 양 전 대사는 조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셈이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일본처럼 독서인구가 많았다면 그는 국내서도 유명인사가 됐을 것이다. 누군가 ‘천하의 명장도 자기 고향에서는 돌쇠’라고 했던가. 양 전 대사가 딱 그렇다. 세계인들 사이에선 ‘대한민국 대표 젠틀맨’이지만 정작 국내에선 평범한 공무원에 불과하다. 이런 아이러니에 대한 양 전 대사의 생각은 어떨까. 공직을 떠난 그는 유명인이기 보다 평범한 소시민이길 원한다. 그리고 그동안 공직에 얽매여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조용하게 살 수 있는 한국의 분위기가 만족스럽다. 그를 만나 최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을 물어 봤다.

그의 저서 ‘장춘에서 오슬로까지’를 읽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 책을 주변인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저자 양세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갖게 된다. 이 책을 읽은 누군가는 “우리나라 외교관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2005년에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그가 36년간 공직생활을 거치면서 겪었던 일들을 소설 형식을 빌려 쓴 자전적 소설이다. 비록 이 책은 ‘소설’이라는 딱지가 붙긴 했지만 그 안의 내용들은 대부분 생생한 경험에서 비롯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이 출간 당시 주목을 끈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잘려지지 않은 외교관의 생활을 생동감 넘치면서 담담하게 그려냈다는 점 ▲다양한 국제 경험을 통해 국제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해 국제화 시대에 부합한다는 점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 책이 서점가에 깔렸을 때 양 전 대사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책의 내용 중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알고 싶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양 전 대사는 이렇다 할 코멘트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점 흐려져 갔다.


가볍고 편안한 삶

양 전 대사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너무도 변해버린 양 전 대사를 기자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1시간 넘게 기다리다 그냥 자리를 뜬 것이다.

이날 양 전 대사는 청자켓에 청바지를 입고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갑자기 젊어진 그를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 약속 다음날 바로 외국으로 출장 간 양 전 대사를 약 한 달 동안 기다린 끝에 겨우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난 곳은 강남의 ‘느리게 걷기’라는 카페에서였다. 카페 이름이 왠지 양 전 대사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도 양 전 대사는 청바지 차림의 편안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에게서 대사라는 고위 공무원의 오만함은 티끌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평화롭고 온화한 노신사의 품위만이 있을 뿐이었다.

양 전 대사는 “이 카페는 샌드위치가 참 맛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라며 샌드위치를 권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곁들이며 양 전 대사와의 잔잔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인터뷰는 약 4시간 동안 진행됐다.


- 요즘 생활은 어떠신가요.
▲ 공직을 떠난 이후로는 특별히 사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주변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 삶을 챙기고 있죠.

- ‘장춘에서 오슬로까지’를 최근에서야 읽어 봤습니다. 책을 쓰게 된 이유라도 있는지요.
▲ 거창한 이유는 없고 그냥 집안의 기록으로서 내 삶을 남기고 싶었어요. 또 사람들에겐 외교관의 삶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었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저의 경험을 사실 그대로 엮은 책임에도 소설이라고 한 이유는 이 속에 다소 민감한 사안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교라는 것이 아무래도 정치와 가깝기 때문에 책 내용을 100% 사실 그대로라고 했을 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어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 평화상 이야기에 눈길이 갑니다.
▲ 제 생각에도 아마 정치에 관심 있는 분들은 그 이야기를 눈여겨보실 것 같습니다. 책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저는 노르웨이 대사로 근무하면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마음먹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자금을 조성해 뇌물을 주거나 로비를 했다는 게 아니고 그저 한 나라의 대사로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잘 봐달라고 선전하고 다닌 정도입니다. 조국의 명예를 높이려 했을 뿐이지요.

- 김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로비공작이 있었다는 의혹도 있잖아요.
▲ 다른 쪽에선 로비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저는 일단 공적 또는 사적으로 주변 인사들과 잦은 교류를 통해 대통령을 홍보한 게 전부입니다. 그리고 노벨평화상위원회 심사위원인 스톨셋 주교와 마침 친분이 있어서 그에게 우리나라 대통령을 잘 좀 부탁드린다고 매달린 정도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와 스톨셋 주교 사이에 금품이 오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더구나 청와대에서 강력한 지시를 내려서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반은 지시였고 반은 자발적이어요.


우리나라 외교수준 아직 멀어

- 책을 읽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 다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저야 과분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특히 일본에서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이 책이 나오자 일본에서 저자인 저에 대한 취재 열기가 대단했었지요. 한 일본 주요방송국에선 책 때문에 저를 취재하러 한국으로 찾아오기도 했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사람들이 국제감각, 특히나 동북아 외교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많이 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외교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우리나라 외교 수준은 어떻습니까.
▲ 우리나라는 아직 외국에 대한 인식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정말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선 외국 상대하는 법을 알아야 해요.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지만 어찌된 일인지 외교에서 만큼은 아직 제자리걸음입니다. 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외교에는 완전한 승리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완전한 승리를 바라지만 그건 이상일 뿐이죠. 받는 게 있으면 반드시 주는 것도 있어야하는 게 외교입니다.

- 일반적으로 외교관들은 편안하게 호위호식 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 그건 외교관들이 자국민에 대한 서비스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겠습니다만 실은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또 외교관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생각보다 스트레스도 많고 생활도 그리 만만하지 않아요. 외교관이란 게 주로 정치적인 일을 담당하다보니 재외국민들을 위한 봉사가 부실한 면도 없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민원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력이 약해서, 또는 정치적 이유로 그 민원들을 선뜻 처리하지 못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외교관들 사이에선 우리나라 외교는 참 외롭다는 자조 섞인 말이 자주 오갑니다.

- 해외에 나가 계신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 같은 게 있습니까?
▲ 제가 대사로는 7개국을 돌면서 근무를 했어요. 저는 새로운 곳으로 부임하면 항상 대사관 직원들에게 자국민 관련 업무에 관한한 ‘안 됩니다’라는 말을 절대 못쓰게 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해 보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어렵지만 해 보겠습니다’, ‘조치를 취해 보겠습니다’ 등의 말을 쓰도록 했어요. 대사관은 외교적인 마찰을 항상 우려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런 시스템은 개선돼야 할 점입니다.

- 외교관으로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고충은 무엇이었나요.
▲ 아무래도 자녀문제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외교관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교육의 해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외교관 자녀들이 잘 먹고 좋은 학교 다니고 잘 사는 줄 알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부모의 뜻과는 무관하게 떠돌이습관이 몸에 배어서 친구들과 깊게 조우하지 못하거나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또 언어적 혼란과 민족적 정체성 혼란도 큰 문제였습니다. 애들 교육에 관심을 갖다보니 교육에 관해 논문을 쓰기도 했어요.

- 앞으로 활동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요.
▲ 지금 현재 일본 여행가이드 북을 집필 중인데, 곧 출판할 예정입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여행가이드북과는 달리 일본 속의 한국을 알리는데 많은 비중을 둘 생각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가서 온천을 즐기고 맛있는 생선초밥을 먹는데 그칠 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오늘날의 일본을 있게 증거, 즉 일본 속의 한국을 많이 소개할 예정입니다. 정말 깜짝깜짝 놀랄 내용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또 관광객이 잘 가는 일본 음식점, 일본 여행지가 아니라 일본인이 잘 가는 음식점, 일본인이 잘 가는 여행지, 일본인이 이용하는 생활 시설 등을 소개해 최대한 실용적으로 일본을 느낄 수 있도록 책을 꾸미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이 작업이 가장 가까운 계획입니다.

이외에도 양 전 대사는 세계 곳곳에 포진한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 외교 감각을 살려 국내 기업 또는 비즈니스맨들에게 비즈니스가이드와 컨설팅을 해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각지를 오가며 옛 지인들을 만나느라 바쁘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다.

외교관 시절 양 전 대사의 만남은 대부분 업무상의 만남이었으나 지금은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이다. 오라는 곳은 많지만 양 전 대사는 결코 방문길을 서두르지 않는다. 이제 그는 느리게 걸으며 자신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만남들을 음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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