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노국공주가 죽고 난 후 1년 후의 일이다.

1366년(공민왕15) 정월 초. 공민왕은 친히 공주 혼전(魂殿)에 제사를 지냈다. 기악의 연주가 극히 유쾌하여 노국공주가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덕녕공주와 신돈이 이 연회에 참가하였으며 밤중에야 헤어졌다. 그러나 공민왕은 공주 혼전을 떠나지 않고 자기 손으로 공주의 화상을 그렸다. 노국공주는 비단에 그려져 다시 살아났다.

공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었소.
꽃피고 새우는 봄이 돌아왔어요.
송악산의 초목은 저렇게 푸르게 물들고

공주가 거닐던 정원의 벚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데…….

공주는 나를 두고 어디로 갔소.

공주, 이 쓸쓸하고 허전한 내 마음 그대는 알기나 하오?

오매불망 그대 향한 그리움에 울부짖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소?

공민왕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마치 곁에 노국공주가 있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괴어 있었고, 용포자락은 흘러내린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일그러진 참담한 얼굴은 차마 용안이라 할 수 없었다. 공민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초. 공민왕은 친히 정릉에 제사를 지낸 후 교지를 내렸다.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공주의 영전(影殿)을 마암(馬巖)에 대궐 수준으로 화려하게 지으라.”

이에 도첨의시중 유탁(柳濯)은 안극인(安克仁)·정사도(鄭思道)와 함께 반대 상소를 올렸다.

“전하, 신이 임금의 봉록을 먹는 수상의 입장에서 어찌 마음속으로 그릇되게 여기면서 임금이 과오를 범하게 하여 후세의 비난을 남기겠사옵니까? 차라리 죽을지언정 바르게 간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전하,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지으려면 수많은 공장(工匠)과 노역부, 그리고 엄청난 목재가 필요하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 영전 공사를 재고해 주시옵소서.”

공민왕은 유탁의 반대 상소를 읽자마자 그를 투옥시키고 파면했다.

이에 신돈이 상주했다.

“전하,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도첨의시중 유탁을 사사(賜死)해야 하옵니다.”

공민왕은 신돈의 참언에 넘어가 유탁을 죽이기 위해 대제학(大提學) 이색으로 하여금 유탁의 죄를 고하는 글을 짓도록 명했다.

이색은 이례적으로 왕명에 따를 수 없다고 버텼다.

“도첨의시중 유탁에게는 죽일 죄가 없으니 감히 명령을 거행하지 못하겠사옵니다.”

공민왕은 대노하여 이색도 투옥시켜버렸다.

유탁과 이색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명덕태후 홍씨는 부랴부랴 편전으로 가서 공민왕게 말했다.

“주상,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탕진하는 큰 공사는 제왕으로서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임금에게 바르게 간한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유탁과 이색 대감을 당장 석방하셔야 합니다.”

신하를 불신하는 공민왕의 성격파탄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유탁과 이색은 얼마 후 풀려났다. 이 일로 인해 유탁은 간신으로 분류된 할아버지 유청신(柳淸臣)과는 달리 ‘고려사’의 충신전에 실린다.

그러나 공민왕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환관 김사행(金師幸)을 공사 책임자로 임명하여 정릉 앞에 화려한 영전을 지어 거기에 진영(眞影, 초상화)을 걸어놓았다.

한참 가뭄 때에 큰 토목 사업이 벌어져서 국고(國庫)가 고갈되고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어 원성이 자자했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한편, 《고려사》에는 당시의 공민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 여러 왕비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별궁에 두고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노국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목숨을 건 이존오의 상소

한편,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는 신돈과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그녀는 공민왕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공민왕이 개혁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여러 신하를 죽이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아들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주상, 죄 없는 신하들을 왜 이렇게 많이 죽이시고 나라에 공이 많은 최영 장군을 귀양 보내십니까?”

“신하들을 많이 죽인 것은 다만 난신(亂臣)을 금하는 것뿐이고, 나라에 공이 있는 충신도 국법을 어기면 죄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주상, 어린 춘추도 아닌데 어찌하여 일개 중에게 국정을 맡기십니까. 국정을 만기친람(萬機親覽)하세요.”

“소자는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지존입니다.”

“주상께서는 백성의 아픔까지 감싸안아야 하는 만백성의 어버이십니다. 어버이다운 도량과 포용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태후마마, 소자는 어버이 노릇이 싫습니다. 임금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주상, 최영 장군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리고 나라의 원훈인 익재 대감이 신돈 일당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어요.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합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요.”

“태후마마, 최영은 군율을 어지럽힌 죄를 지었으며, 익재 대감은 파당을 만들어 사정(私情)에 따르고 있습니다.”

“주상, 제(濟)나라 환공은 ‘물망재거(勿忘在, 거에 피난 가 있던 때를 잊지 않는다)’를 국정 운영의 지표로 삼아 첫 번째 춘추패자가 되었습니다. 부디 연경에 볼모로 가 있던 시절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

이처럼 모후의 피 끓는 간언도 무용지물이었다. 공민왕은 명덕태후를 원망하였다. 그 이후로 모자지간은 점점 멀어져갔다. 공민왕은 한동안 명덕태후에 대한 문안인사조차도 하지 않은 불효를 다반사로 저질렀다.

조정은 완전히 신돈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최영이 귀양을 가고 이제현마저 예전의 권위를 잃어버리자 신돈의 위세는 날로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백관들은 아예 대궐로 가지 않고 신돈의 집으로 출근하여 국사를 논의했다. 신돈에게 아부하여 벼슬이 승차한 찬성사 이춘부(李春富)와 밀직부사 김란(金蘭)은 매일 아침 신돈의 집을 다녀와서야 등청을 하였다. 이운목(李云牧)은 출가한 딸을 신돈과 사통하게 한 뒤 응양상호군이 되었다.

명덕태후를 비롯한 종친들은 신돈의 이러한 전횡과 발호를 우려했지만, 신돈에 대한 공민왕의 믿음은 여전하여 오히려 그 비판 세력들이 제거 당했다. 고려 왕조 멸망의 노을이 점점 드리워지고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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