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세계 유일 ‘반세기 세습정치’ 장본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8월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건강 회복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월초 김일성대학의 축구경기에 52일 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났다는 북한 언론보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나 동영상이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건강 이상설이 재차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측의 테러지원국 해제 보류에 따른 북측의 영변 핵시설 복구라는 강경책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수 있는 민감한 상황이다. 북측의 2천2백만 인민을 다스리고 있는 김 위원장의 건강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측의 5천만 국민들의 안정과 직결된 사안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관심을 일으키고 있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집중 조명해 봤다.

신장 162cm, 체중 80kg이상, 고수머리, 두꺼운 안경테 혹은 짙은 선글라스 착용, 인민복 차림, 키높이 구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외견상의 모습이다. 70년대 태어나 80년대 살았던 인사들에게는 유명 TV 애니메이션 영향으로 북한의 지도자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묘사돼 악독한 인물로 표현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을 접한 인사들의 인물평 역시 극과 극을 이뤘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거나 화해 분위기에 따라 김 위원장의 평은 다르게 나왔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김 위원장은 ‘예측불허의 괴팍한 인물’, ‘말을 더듬는 냉혈주의자’ 등 혹평이 주를 이뤘다. 97년 망명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위험한 인물’에 ‘통치능력이 떨어지는 지도자’라고 부정적은 평가를 내렸다.

1986년 북한을 탈출한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김정일은 머리가 좋으나 따뜻한 인간성이나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냉혈인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당시 신상옥· 최은희 심문 조사 보고서에는 “김 위원장은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찬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랑꾼”이며 “쉽게 모욕감을 느끼고 상대방으로부터 무례나 비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유아적인물로 묘사했다.


신상옥·최은희가 본 김정일

그러나 1997년도 DJ 정부가 들어선 이후 김 위원장에 대한 평가는 호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98년 500마리 소떼를 몰고 북한을 방문한 고 정주영 회장은 “김 위원장이 나를 어른으로 잘 대접해 줘 무척 고마웠다”며 “논리가 정연하고 활발하다”고 평했다.

김 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DJ 역시 영어권 매체와 인터뷰에서 “영리하고 솔직한 사람이며 한국과 세계 문제에 정통해 있다”고 극찬까지 아끼질 않았다. 또 그는 “지난 2년간 북한의 통제 경제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단지 지나치게 빠른 변화를 우려하는 강경파의 견제를 받고 있을 뿐”이라며 “김정일 치하의 북한은 덩샤오핑의 통치 초기 중국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절상했다.

동행했던 박지원 전 장관 역시 최근 한 대학교 특강에서 “김 위원장은 영특하고 위트가 있다”며 “국제 정세를 소상히 알고 있는 지도자”라고 DJ와 같은 평가를 내렸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김 위원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노 전 대통령은 CNN과 2007년 12월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에 대해 “직선적으로 얘기하지만 경청하고 유머도 사용하고 상대에게 안정감과 호감을 느끼게 한다”며 “주장과 양보를 구분할 줄 아는 유연성을 가진 협상가”라고 호평을 내렸다. 김 위원장에 대한 인물평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모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영리하고 영특하다’는 평가는 대체적으로 동감하는 평가다. 특히 그가 20년동안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늘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 와신상담형

1994년 7월 북한을 50년간 통치해온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은 짧으면 3일, 길어도 3년이면 북한체제가 붕괴한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1997년 김 위원장이 노동당 총비서에 공식 취임한 이래 지금까지 건재하다.

김 위원장은 1964년 처음 근무를 중앙지도과 지도원으로 시작했다. 이 부서는 노동당의 양대 핵심 부서인 조직 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장악할 수 있는 권력 핵심부서다. 이로 인해 김 위원장은 1970년대 초반 강력한 숨은 실력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73년 9월에는 조직과 선전 담당 비서로 임명되고 선전선동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하면서 1973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노동당, 군대, 정부, 대남사업의 순서로 후계자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김 위원장은 북한 전 지역을 누비며 후계 체제 확립을 위한 조직을 정비하고 강습을 주재하는 등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동시에 김 위원장은 스스로 주도하는 검열사업을 통해 후계체제에 저항하는 간부들은 여지없이 지방으로 좌천시키거나 숙청함으로 정적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신설된 국가보위부가 전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시기다.

당-정-군에 대한 개편이 종결된 직후 소집된 1980년 10월 6차 당 대회는 김 위원장을 위한 대회였다. 이날 김 위원장은 주석단 맨 앞줄 끝에 자리 잡아 대회 집행부 명단 상 서열 5위로 자리매김하는 공식적이 자리였다. 당 대회 마지막 날에는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위위원, 당비서, 군사위원으로 모든 지위에 임명된 유일한 경우였다. 1985년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미하일 슈브니코프가 소련 당 중앙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이 당 정치국원의 인사에게까기 거의 전권을 행사하는 등 이미 당, 국가의 인사권을 포함한 국가정책 전반에 걸쳐 지휘 감독권을 행사해 사실상 후계자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다”고 보고했다.


여자관계 복잡, 영화, 사냥, 운동 취미 다양

이때부터 17년만인 1997년 10월 그는 당 총비서에에 취임해 북한의 명실상부한 ‘김정일 시대’를 열었다.

김 위원장이 확고하게 후계자를 자리잡는 것을 목도한 당시 인사들은 “김정일이 간부들과 토론이나 회의석상에서 유머와 재치를 보이는 등 말솜씨가 있었다”며 “김일성이 주석으로 있을 때는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김정일 스스로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자제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이미 후계자로 나서기 전부터 북한의 통치 방식을 익히 알고 있어 아들이 대중 앞에서 나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인지했던 셈이다.

김 위원장은 1964년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동기생인 홍일천과 결혼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둘 사이에는 김혜경을 낳고 얼마 후 이혼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홍씨와 결혼을 극구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1973년 9월 조직비서가 된 후 2번째 부인으로 김영숙과 재혼해 김설송과 김정철이란 두 아들을 낳았다. 성혜림과는 김정남을 얻었다. 통상 3남 1녀라고 알려져 있지만 김정남과 김설송이 동일인물이라고 말도 있을 정도로 베일에 쌓여 있다.

복잡한 여자관계처럼 김 위원장의 취미와 특기 또한 유별난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선전물을 보면 그가 예술 분야, 특히 영화와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문화예술 부부장으로 있을 당시 가극인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 파는 처녀’ 등 이른바 북한의 ‘5대 혁명가극’을 만들어 ‘혁명 1세대’들로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영명한 지도자’ 등 호평을 얻었다.

또한 김 위원장이 영화광이라는 사실은 국내외 언론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메뉴로 잘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 탈출한 최은희씨는 “김정일 자신이 직접 관리하고 통제하는 영화문헌 창고에는 세계 각국의 영화 1만5천여편이 소장돼 있으며 녹음성우, 번역사, 녹음기사 등 관계직원들만 250여명에 이른다”며 영화에 조예가 깊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취미와 운동은 수영에서부터 사냥, 사우나, 낚시, 승마, 테니스, 운전 등 다양한 편이다. 특히 사격 실력은 수준급으로 정평이 나 있다. 북한군사이에서는 ‘장군님은 명사수 우리는 명중탄’이라는 찬양 노래까지 나올 정도다. 자동차 운전 역시 취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고교 2학년 때인 1958년 처음 핸들을 잡기 시작한 그는 틈만 나면 차를 몰고 평양 시내를 질주했다. 당연히 사고도 여러분 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위원장이 직접 운전하는 것을 목격한 한 북측의 인사는 “1975년 여름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벤츠 600을 몰고 가다 전신주를 들이받은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김 위원장은 한국음식을 좋아하고 즐기는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육류로 불고기와 개고기 및 내장탕 등이며 생선탕도 매우 좋아한다.

최근 ‘건강이상설’에 ‘영변 핵시설 복구’로 한반도 분위기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다. 김 위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미국이나 남측 역시 원치 않고 있는 상황이다. 가장 큰 이유는 ‘포스트 김정일 체제’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변 핵시설 복원 역시 김 위원장이 와병으로 칩거하는 사이 군내 강경파의 전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세습, 군부, 집단지도체제 ‘안개’

현재 거론되고 있는 북측의 권력구조 변화는 세습, 군부통치, 집단지도체제 등이 예측되고 있다. 세습이 이뤄질 경우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3대 세습’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김 위원장의 아들로는 장남 김정남(38)과 이복동생 김정철(27), 김정운(24)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김 위원장과는 달리 후계자 수업을 받지 않았거나 최고 권좌에 오르기에는 나이가 어린 편이다. 김 위원장이 무리해서 권좌를 물려줄 경우 자칫 반발을 가져올 수 있어 부담스럽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다음으로 군부통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군부 내 파벌이 다양하고 갈라져 있어 한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 위원장의 자식들을 끼고 군부가 나누질 경우 내부 분열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 김정일’체제는 집단지도체제가 될 전망이라는 게 지배적이다. 김 위원장의 아들과 북한 노동당, 국방위원회 또는 현재의 권력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연합해 자연스럽게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할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통치 형식이건 김 위원장의 ‘밀지’ 역시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예정이다.


#김정일 프로필

▶ 1942년 2월 16일 (양력)
▶ 소련 하바로프스크/백두산 밀영 (북측주장)
▶ 혈액형 A형
▶ 삼석인민학교, 평양제4인민학교
▶ 평양제1중학교/남산고등중학교
▶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 조선노동당 중앙위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
▶ (현) 조선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
▶ (현)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 (현) 인민군 최고사령관
▶ (현) 공화국 원수
▶ (현) 국방위원회 위원장 (1998년,2003년 재추대)
▶ (현) 조선노동당 총비서



##베일 벗는 김정일 리더십

자기연출 능하고 포퓰리즘 측근 정치 선호

김정일 위원장이 늘 간편한 인민복을 입고 공식적인 행사에 나오는 것은 고도의 자기연출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점퍼는 혁명복이자 전투복으로 인식되고 있어 스스로 ‘혁명전사’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은 발로라는 설명이다. 동시에 점퍼는 인민복으로 서민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소박하게 보인다. 대중정치 즉 포퓰리즘에 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치는 밀실정치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위원장은 당과 군의 일부 간부들을 데리고 다니는 데서 기인했다. 특히 1994년 아버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 체제 위기에 봉착하자 김 위원장은 ‘비상관리체제’로 돌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군 부대를 비롯해 지방 현지지도를 나갈 때면 당-군-대남분야의 현안을 보고받기위해 분야별 최고 담당자들을 항상 동행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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