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야 산다’vs‘독해야 산다’

프로배구 플레이오프 인천 대한항공 대 대전 삼성화재의 경기가 열린 인천시립도원체육관에서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지시를 하고 있다. (좌) · 프로배구 현대캐피탈 대 LIG 손해보험의 경기가 열린 서울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에서 현대 김호철 감독이 4세트때 점수가 앞서나가자 손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다.

지난 12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벌어진 2008~2009 NH농협 프로배구 챔피언결정전은 가히 ‘혈전’이었다. 배구계 최고의 라이벌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은 시종 불꽃같은 득점을 나눠가지며 체육관을 가득 매운 만원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세트스코어 3-2.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의 격한 승부 끝에 신치용(54) 감독이 이끄는 삼성화재가 김호철(54) 감독의 현대캐피탈을 물리치는 순간, 수천에 달하는 관중들은 일제히 명승부를 보여준 양팀 사령탑과 선수들을 향해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승패는 갈렸지만 모두가 승리자였던 뜨거운 프로들의 열전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만큼 뜨거웠던 것. 무엇보다 양 팀을 프로배구 최정상급 팀으로 올려놓은 신치용, 김호철 감독의 리더십은 시즌을 즐기는 또 다른 흥행요소가 되었다. 40년 지기 친구에서 최강의 라이벌로 자리매김한 두 명장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코드의 신사’ ‘제갈공명’ 등으로 불리는 신치용 감독. 이번 시즌까지 프로통산 세 번째 우승을 거머쥐었고 슈퍼리그 8연패까지 더하면 무려 11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명장이지만 올 시즌 삼성화재의 우승을 점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현대가 우승할 것” 전문가 예언 모두 틀렸다

주전 대부분이 30대 유부남으로 구성된 데다 키가 작은 삼성화재가 패기 넘치는 토탈배구를 구사하는 현대를 상대하기에는 힘에 부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성화재는 막판 뒷심을 발휘해 최후의 승자로 올라섰다.

삼성화재의 우승 원동력은 다름 아닌 ‘믿음의 배구’가 꽃을 피운 덕분이라는 게 배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챔피언 결정전이 막을 내리던 지난 12일 신치용 감독은 경기를 마친 뒤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세트 할 때는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나고 보니 피로가 싹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시즌 개막 전 전문가들은 강력한 우승후보로 현대캐피탈을 꼽았다. 또 대한항공 점보스와 LIG 손해보험이 삼성-현대로 굳어진 양강 구도를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화재가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시즌 초만 해도 이 같은 ‘예언’은 적중하는 듯 했다. 1라운드에서 최약체 KEPCO34(한국전력)과 상무를 제외한 나머지 프로팀에게 연패를 당한 것. 그러나 신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2라운드 첫 경기를 앞두고 신 감독은 선수단을 챙겨 계룡산에 올랐다. 선수들 역시 신 감독고 함께 나선 산행이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을 터였다.

힘든 산행과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의지를 확인한 선수들은 이후 무섭게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신 감독의 놀라운 관리 능력은 외국인 에이스인 안젤코를 다루는 면에서도 눈부셨다.

신 감독은 한 번의 국내리그 우승을 경험한 안젤코가 자만심에 빠질까 일부러 모질게 대했다. 외국인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도 전혀 없었다. “외국인 선수를 데리고 와서 왜 끌려 다녀야 하나. 할 말도 다하고 시킬 것도 다 시킨다”는 게 신 감독의 지론이다.


코트의 신사, 선수에겐 ‘저승사자’

1995년 삼성화재 창단 감독으로 15년 째 사령탑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치용 감독은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지도자다. 경기 중 느긋하게 작전지시를 내리는 신 감독은 ‘제갈공명’이라는 부드러운 별명으로 불리지만 훈련장에서는 180도 변신한다. 선수들 사이에서 ‘저승사자’라 불릴 만큼 훈련 강도가 엄청난 신치용 감독.

선수들은 400m 트랙을 1분 30초씩 16바퀴나 달려야 했다. 만일 시간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통과할 때까지 달려야 했다. 훈련을 못 견디고 구토를 하며 나가떨어진 선수들이 수두룩했다.

힘든 훈련을 버틴 선수들은 경기장에 나가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멀티 플레이어’가 돼야 했다. 신 감독은 “공격수가 공격 잘하는 것은 기본이다. 수비까지 뒷받침 돼야 좋은 선수다”라고 강조했던 것.


지금은 KBS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월드스타’ 김세진 역시 하루에 2~3시간 이상 훈련장 구석에서 스파이크 리시브 훈련을 받아야 했을 정도다. 선수들의 입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고 집단으로 숙소를 이탈하는 ‘사고’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태를 잠재운 것은 신 감독의 확신에 찬 한마디였다. “건의는 할 수 있지만 불평은 용납하지 않는다. 이 훈련을 참고 따르면 30살이 넘어도 운동할 수 있도록 내가 책임지겠다.”

확신에 찬 신 감독의 맹세에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은 신 감독을 믿었고 신 감독 역시 선수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지옥훈련을 통해 선수들은 강철 체력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영악한 제갈공명,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

TV중계가 뜨면 마이크 앞에선 속공을 지시하면서도 팀의 주축인 최태웅 세터에게 귓속말로 후위공격을 시킬 정도로 영악한 사령탑이 신치용 감독이다. 신 감독의 또 다른 성공비결은 바로 선수들의 단점보다 장점에 주목하는 능력이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삼성화재는 키가 작고 나이가 많아 체력적으로 부족한 단점이 있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나이가 많다는 건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이고, 키가 작다는 건 순발력이 좋아 서브·리시브에서 강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훈련 때 공격보다 수비훈련에 많은 비중을 뒀다. 만약 우리 팀에 장신 선수가 많았다면 서브나 블로킹 등 다른 쪽으로 전술을 극대화 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지론은 ‘리더로서 상황에 맞게 변화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삼성화재는 대학 출신 선수들이 기피하는 구단 중 하나였다. 훈련양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선수와 가족간의 만남도 극도로 제한돼 일부 선수 가족들은 “여기가 군대냐”며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신 감독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서른줄에 접어든 선수들은 여전히 전성기 폼을 유지하며 신 감독과 팬들의 기대에 멋지게 부응했다. 신 감독의 신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신치용 식 믿음의 배구는 지난 2007년 또 한번 진화했다. 선수단을 30대 중반의 고참 선수와 주전 선수로 이뤄진 A그룹과 신인 및 후보 선수들로 구성된 B그룹으로 나눠 훈련 스타일을 차별화 한 것.

A그룹은 신 감독과 한솥밥을 먹은 지 10년이 넘은 베테랑으로 완전히 믿고 최대한 자율에 맡겼다. 반대로 젊은 선수들이 주축인 B그룹은 신 감독이 직접 챙기며 길들였다. 이 같은 훈련 스타일은 올 시즌 우승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뜨거운 승부욕 불타는 ‘이탈리안 카리스마’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 없이 늘 평정심을 잃지 않는 신치용 감독과는 반대로 현대캐피탈 김호철 감독은 매 순간 그야말로 ‘열혈하다’. 김 감독은 경기 승패에 따라 얼굴에 희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수하는 선수에게 즉석에서 벼락같은 호통을 치는 건 기본이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코트에 등을 깔고 드러누울 정도로 ‘뜨거운 남자’다. 과거 ‘컴퓨터 세터’로 불리며 이탈리아 리그에서 감독을 지낸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김 감독의 또 다른 특징은 특유의 ‘오버액션’이다.

현대캐피탈이 삼성화재의 9년 아성을 깨고 최강의 토탈배구를 구사하기까지 김 감독의 열혈남아적 기질은 감독으로서의 전성기를 불러오는 원동력이 됐다. 승리를 찍어내는 김호철식 ‘토털 배구’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배구 전문가들은 김 감독의 지휘 스타일에서 ‘과학’과 ‘카리스마’를 읽는다. 김 감독은 프로배구 최고봉인 이탈리아 리그에서 선수생활과 감독 경험을 거친 선구자다. 현대가 김 감독의 부임 이후 급성장한 것 역시 그가 이탈리아에서 경험한 ‘과학배구’라는 선진 시스템의 도입이 큰 힘이 됐다.

김 감독이 구사한 과학배구는 맞춤형 체력훈련과 데이터 분석을 축으로 하고 있다. 이탈리아 트레비소클럽의 전문 트레이너를 부임 첫해 영입해 포지션 별로 필요한 근육을 집중적으로 발달시키는 맞춤형 훈련으로 선수들의 체격을 강화시켰다.

더불어 상대의 경기장면이 찍힌 비디오를 이탈리아에 있는 전문 분석관에게 보내 상대의 허점을 짚어내는 ‘데이터 배구’를 실현했다. 김 감독의 배구는 스포츠의 의미를 뛰어넘어 이미 과학의 영역인 셈이다.


‘데이터 배구’로 선수단 녹이다

현역시절 세계 최고의 세터출신답게 김 감독은 팬서비스 정신과 스타성도 다분하다. 피가 끓는 다혈질인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그가 부임하기 전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의 그늘에 가려 무려 9년간의 암흑기에 빠져 있었다.

‘만년 2인자’의 설움에 찌든 현대를 구한 것은 태양처럼 강렬한 김호철의 카리스마였다. 눈빛이 살아있는 김 감독이 죽어있던 조직을 카리스마로 흔들어 깨웠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강한 리더십이 조직을 바꾼 전형적인 케이스가 바로 김호철의 현대캐피탈이다.

김 감독의 독특한 리더십은 불굴의 승부욕과도 연관이 깊다. 그야말로 지고는 못 배기는 김 감독의 성격 덕분이다. 현대캐피탈의 고공비행은 삼성화재라는 난공불락을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 감독은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에 대한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배구 열기를 끌어올리고 팀 발전을 위해 목표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여기에 삼성화재의 수장 신치용 감독과 40년 지기 친구라는 흥행요소까지 더해져 두 팀의 맞대결은 프로배구 사상 최고의 흥행카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김 감독의 불타는 승부욕은 영악한 신치용 감독과의 머리싸움을 한 단계 진화시킨 매콤한 양념이 된 셈이다.


#신치용 감독프로필

▶ 출생 : 1955년 8월 26일
▶ 출생지 : 거제
▶ 직업 : 배구감독
▶ 소속 : 삼성화재 블루팡스 감독,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 신체사항 키 : 184cm 체중 : 88kg
▶ 혈액형 : AB형
▶ 가족사항 : 아내, 2녀 (차녀 신혜인)
▶ 취미 : 골프

학력
▶ 성지공업고등학교-성균관대학교 행정학 학사
경력
▶ 2008. 06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
▶ 2007 프로배구 V-리그 남자 올스타전 V스타팀 감독
▶ 2005 프로배구 V-리그 우승
▶ 2002 제14회 아시안게임 우승
▶ 2002 대한민국 남자국가대표배구팀 감독
▶ 2001 세계그랜드챔피온스컵 4위
▶ 2001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 우승
▶ 2002. 01 삼성화재해상보험 총무파트 상무대우



#김호철 감독프로필

▶ 출생 : 1955년 11월 13일
▶ 출생지 : 밀양
▶ 직업 : 배구감독
▶ 소속 :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 신체사항 키 : 175.0cm 체중 : 68.0kg
▶ 혈액형 : A형
▶ 가족사항 : 아내, 1남 1녀

학력
▶ 대신고등학교-한양대학교 학사
경력
▶ 2007 프로배구 V리그 남자 올스타전 K스타팀 감독
▶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 2006 세계남자배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감독
▶ 2006 남자 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 2004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감독
▶ 2001 트리에스테 감독
▶ 1999 라벤나 밀라빌란디아 감독
▶ 1996 베네통클럽 트레비소 감독
▶ 1995 멕시카노 파르마클럽 감독
▶ 1987 베네통클럽 트레비소 선수
▶ 1978 세계배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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