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지키기 위해 한 평생 바쳐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을 통해 울창해진 독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어느 곳이라도 피로 점철된 역사의 편린을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없다. 특히 동해의 고도(孤島) 독도는 아직도 일본과의 영유권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며,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침탈과 그 땅을 지키기 위한 백성들의 저항의 숨결이 살아있는 우리의 땅이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예균(61)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 상임고문은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동해 거센바람을 알몸으로 버티어오던 독도가 푸른 옷을 입게 된 것은 이예균 씨와 울릉도 청년들의 공적이다. 울릉도 애향회 등 독도를 아끼고 사랑하는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푸른 울릉·독도 가꾸기모임’은 1990년부터 수천그루의 나무를 심어 푸른 독도를 만들어왔다.

물론 독도에는 지난 1973년부터 사회 각 단체들이 10여 차례에 걸쳐 1만1천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으나 활착에 성공하지 못했다. 푸른 독도 가꾸기모임도 처음에는 실패했다. 이들은 1989년 ‘독도조림 5개년(1989~1993년)계획을 세우고 해송 등 7종의 묘목 1,780그루와 비료 200부대에다 흙까지 가지고 가 6일 동안 먹고 자면서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심은 나무들은 대부분 말라 죽거나 토끼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산림청 임업연구원, 경상북도, 울릉군과 함께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해풍에 적응이 안 된 탓이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1990년과 1991년에는 살아남은 나무에 비료를 주고 유실된 흙을 채우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예균 씨는 1992년 3월 모임의 명칭을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으로 바꾸고 회원수도 102명으로 늘렸다. 울릉읍 사동 3리에 독도조림용 해풍적응묘포를 설치하고 눈향, 동백, 섬괴불, 보리장, 사철, 후박, 감탕 등의 수종을 갖췄다. 묘포는 분재식으로 키운 후 독도에 그 흙과 함께 가져가서 묻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심어진 나무 가운데 현재 800여 그루가 성목으로 자라고 있으며, 서도 물골에 심은 섬괴불의 경우 3m 이상으로 자라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예균 씨는 “이전까지 독도에 심어진 나무들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는 것은 생색내기 행사위주의 사업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도에 무궁화를 심은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무궁화는 독도에서 살아날 수 없는 생태적 특성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징적 의미만 생각하다보니 그런 오류가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독도를 푸르게 하는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의 독도 가꾸기 운동은 단순한 환경보호를 초월한 상징적 의미가 크다. 그 자체가 우리의 실효적 점유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폭격의 실상 폭로

이예균 씨의 독도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씨는 한국외대 독도연구회와 함께 1948년 미공군에 의해 자행된 독도폭격의 실상을 폭로하고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독도주변 바닷속에 있던 폭탄을 수거하여 독도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푸른울릉·독도가꾸기모임과 독도연구회 회원들에게 1995년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폭격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공병업, 장학상, 김찬수 씨 등의 녹취록에는 끔찍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담겨 소중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독도 폭격사건에 대해 당시 미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 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우리 정부 차원에서 진상과 피해조사에 나선 적도 없다.

이예균 회장은 “당시 독도 서도 부근에서 미역 등을 채취하던 어선 82척 가운데 단 2척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 비극적 사건이었는데, 사건 직후 지금까지 정부측의 책임 있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예균 씨는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난 2006년 한국외대 독도연구회와 함께 독도폭격사건희생자 위령제를 거행하기도 했다. 폭격된 지 무려 60여년만에 진행된 위령제 현장에서 희생자 가족들은 물론 참가자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이예균 씨는 울릉도에서도 기발하고, 배짱이 좋기로 유명하다. 지난 2006년 일본의 측량선 침입시도 사건은 그의 두둑한 배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해 4월 독도 주변 해역을 탐사할 일본해상보안청 측량선이 일본 사카이 항에 대기하면서 한·일 양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우리 정부에서도 민간 측량선에 대해 경찰력이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 민간 측량선에 군사적으로 대응할 경우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일 될 수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예균 회장이 돌파구를 열었다. 그는 “민간 측량선에 민간어선으로 맞서겠다. 일본 측량선이 독도 근해로 진입하는 시기에 맞춰 지역내 오징어 채낚기어선 300여척과 유람선 등을 한꺼번에 출항시켜 측량선의 접근을 원천봉쇄하겠다"고 밝혔었다.

만약 일본 측량선의 침입으로 우리 어선이 파손되거나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면 오히려 일본이 국제 분쟁을 야기한 것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 역전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측량선을 독도로 출항시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예균 씨를 독도사랑 행동대장 정도로 보면 오산이다. 그는 지난 2005년 그간의 독도활동결과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외대 김성호 씨와 함께 <일본은 죽어도 모르는 독도이야기88>(예나루)를 펴내기도 했다.

이들은 이 책에서 “일본이 독도를 욕심내는 진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 독도를 강탈한 러·일전쟁 당시 상황을 주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해신(海神)으로 추앙받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동해에 수장시키고 1905년 5월28일 항복을 받아낸 곳이 독도 앞바다라는 것이다.

이들은 “독도는 러·일전쟁때 일본 작전권의 핵이었고 전쟁의 종결 지점이었다”고 규정하고 “러시아를 격파해 일약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한 전승 기념성지인 만큼 일본은 독도를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야 그들을 막아낼 대응책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예균 씨는 독도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독도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독도해설사로, 공무원들을 위해 독도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독도문제의 실상에 대해 알리기 위해서라면 어디라도 달려가겠다는 각오다. 그것이 독도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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