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서민들 애환과 고통 함께해”

경남만평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기란 힘들다. 그것도 각 방면에서 모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김선학 씨는 그의 이름 앞에 어떤 호칭을 붙여야할지 망설여지는 인물이다. <경남신문>에서 시사만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김선학 씨는 기자로부터 시작해 만평, 4칸 만화, 화가 등 1인 4역을 담당하고 있다.

<경남신문>의 독자들이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찾는 것은 <경남만평>이다. 한 컷의 만평만 봐도 복잡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흐름·현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머와 익살, 풍자를 통해 통쾌하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평을 그리는 주인공은 30여 년 째 서민들의 애환과 고뇌를 함께 해온 김선학 화백. 그의 만평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자신은 마감시간에 맞춰 작품을 창작해야하는 엄청난 부담 속에서 작업을 한다.

시사만화라는 것이 주어진 시간 내에 일그러진 세태와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한 컷에 응축시켜 담아내야 한다. 그것도 해학과 풍자로 말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 일찍 승부가 결정된다. 새벽부터 일어나 그 날의 작품을 구상한다.

아침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나타난 그는 국내 언론매체들을 섭렵한다.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만평도 꼼꼼히 살핀다. 다른 신문 시사만평과 중복되거나 비슷한 표현법을 피하기 위해서다.

“시사만화가들이 주목하는 사건이나 구상하는 아이디어는 거의 비슷하다. 우연히 비슷한 이미지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독자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흐름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구상은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구상이 곧장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마감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초조해진다. 마감시간은 작가들에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하는 마지노선이다.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그의 손에는 담배가 떠나질 않는다. 초침이 넘어갈 때마다 목은 바싹 타 들어간다. 초긴장 상태에 들어간 김화백의 손놀림은 빨라지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만 수북이 쌓이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다행히 작가의 마음에 들 때는 하루 종일 콧노래가 나온다. 하지만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을 때는 우울해진다. 아무튼 아침 9시가 되면 시사만평인 <경남만평>, 4칸 시사만화 <거북이>가 한꺼번에 작가의 손을 떠나 편집국장의 자리에 놓인다.

경남신문 남부희 상무이사는 “거북이의 건강함을 우선 좋아한다. 그의 만화는 세상인간들이 일으킨 온갖 일들을 독자에게 최선의 목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와 미래의 그 어떤 세속적인 일이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인생의 자극과 고무로 지면을 수놓는다. 그것은 이 시대의 새로운 삶을 향한 저항이요, 우리가 공동으로 지향해야 할 희망”이라고 밝힌다.

그는 한 컷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한 컷의 만화는 정확하게 본질을 짚어내며, 수많은 기사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담아낼 수 있다. 그것도 재미있고, 통쾌하게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독자들의 사랑은 식지 않고 있다. 요즘처럼 이미지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는 더욱 인기다.

김선학 화백은 시사만화가 갖추어야할 조건으로 4가지를 제시한다.

“시사만화는 선이 간결해야 한다. 둘째는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사성이 담겨야 하며, 마지막으로 건강한 사회비평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의 작품 <거북이>가 걸어온 길은 한국현대사의 명암과 그대로 연결된다. 군부독재의 폭거 속에서도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왔다. 현재 8000회 연재를 돌파했다. 경이적인 기록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올곧은 시사만화가들의 필수코스처럼 여겨졌던 필화사건은 김선학 화백이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1982년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을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전두환 이순자와 연계하여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보안대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잡혀간 것은 아니냐?”, “다시 만평을 볼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등 독자들의 격려와 전화가 쇄도, <경남만평>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실을 말하고자 했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 하루에 몇 차례 그려야하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만화를 그리게 되면 어떤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까하여 스스로 판단하면서 작업을 했다. 억압은 작가의 창작력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급한 불을 끈 후에는 잔불을 정리해야 한다. 시사만평을 끝낸 후에는 신문에 연재되는 소설의 삽화를 그려야 한다. 그의 삽화는 만평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독자들은 두 작품이 한 사람이 그렸다는 것을 가늠하기 힘들다. 김선학 화백은 “만화는 매일 매일이 새롭다. 그날 사건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에 비하면 삽화는 쉬운 편이다. 소설 내용대로 영상화만 시키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실력은 한학자로 뛰어난 명필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고, 고교 2학년 때 이미 호남매일신문에서 삽화를 그릴 정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순수회화에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고교시절 전국학생미술실기대회에 6번 출품, 모두 특선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남일보 문화부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 그가 시사만화를 그린 것은 1977년 경남신문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다. 30년째 취재기자로, 시사만화가로, 삽화가로,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경남신문 편집위원(국장급)으로 재직 중이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상(언론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이 시대 역사와 민중의 삶을 알려주는 풍향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문화평론가 전문수 창원대 교수는 “민중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누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고 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여유와 웃음을 선사한다. 촌철살인격의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유머로써 서민들의 어두운 마음을 풀어주기도 한다”고 말한다.

[김사민 기자] sindo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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