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과 ‘1조원 특허소송’ 승리… 골리앗 이긴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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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스물여섯 살 청년이 이끌고 있는 국내 중소기업(직원 9명)이 세계 최대 일본 자전거 업체를 상대로 1조원대 특허다툼을 벌여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1조원대 소송은 중소기업 특허권 소송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지난 4월 6일 자전거 부품 전문업체 ‘엠비아이(MBI)’ 임직원들은 손에 땀을 쥐며 일본에서 걸려올 전화 한통을 기다렸다. 4월 6일은 세계 최대 자전거회사인 일본 시마노사와 특허권 침해 소송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었다. 엠비아이 유혁(26) 대표이사 앞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일본에서 온 전화였다. 유 대표는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엠비아이가 시마노사에 승소했다는 소식이었다. 일본의 시마노사는 연매출 3조5000억원에 직원 5500여명을 거느린 자전거업계의 ‘골리앗’이다. 내심 이기리라 기대는 했지만 시마노사의 ‘앞마당’인 일본에서 벌인 소송이었던 만큼 만약의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지난 11일 낮 12시께 충북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에 위치한 ‘엠비아이’ 사무실에서 화제의 주인공 유혁 대표를 만나 20대 중반 어린나이에 중소기업 대표가 되기까지의 그간 사연을 풀스토리로 들어봤다.

유혁 대표는 1983년생으로 올해 만 26세다. 그는 젊은 나이에 CEO가 된 것과 관련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을 아꼈다.

2005년 군 제대 후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엠비아이에 입사한 유혁 대표는 특유의 성실함을 인정받아 4년 만에 팀장을 거쳐 대표이사로 파격 승진했다. 그는 지난해 대표이사에 오르기 전 결혼도 했다.

못 다한 학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유 대표는 현재 방송통신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총 9명으로 이뤄진 중소기업을 이끌고 있지만 포부는 확실했다.

그는 영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 “앞으로 엠비아이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야하기 때문에 이쪽 공부가 필요하다”며 “해외에서 기술력을 더 인정받기 위해선 영문학 공부가 필수적이다”고 말했다.


“자전거는 아버지와 나의 꿈”

1994년 설립된 엠비아이의 원래 이름은 세계산업. 평소 자전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유 대표의 아버지 유문수(54) 기술고문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2005년 사명을 변경했다.

이 회사 창업주인 유 고문은 자전거 핵심부품인 변속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개발에 몰두했다. 친환경 교통수단인 자전거가 언젠가 돈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사업은 쉽지 않았다. 자전거산업은 이미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대만과 자전거 수출량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 값싼 중국 자전거에 밀리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때에는 자전거 부품업체들이 잇달아 도산했다.

그러나 유 고문은 직원들과 의기투합해 자전거 변속기 연구개발에 몰두했다. 특히 기존 자전거 변속기는 외부에 노출돼 체인이 잘 벗겨지고 변속 속도도 느린 데다 소음도 심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수년간의 실패 끝에 마침내 유 고문은 밀폐된 원통형 장치에 변속 부품들을 한 데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보기에도 깔끔할 뿐 아니라 고장도 잘 나지 않았다. 1999년 12월에는 국내 특허출원(특허번호 436697)에도 성공했다.

이어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38개국에 특허 등록을 마쳤다. 중소기업으로서 비용부담이 컸지만 기술이 곧 경쟁력이라는 믿음과 주주들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시마노에 정면 도전”

시련은 다시 다가왔다. 아직 판로도 개척하지 못했는데 유럽에서는 엠비아이의 변속기와 흡사한 시마노의 변속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연간 500만 대씩 팔렸다. 엠비아이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뒤늦게 사태 파악에 들어간 결과 다행히 기술유출은 없었지만 시마노 변속기 특허가 엠비아이보다 3개월 늦은 2000년 3월 등록된 사실을 알게 됐다.

엠비아이는 법무법인 태평양을 통해 지난해 3월 유럽에서 자전거 수요가 가장 많은 독일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에 ‘자전거 변속기 특허권 침해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시마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본 특허청에 특허 무효 심판을 청구해 ‘맞불 작전’을 폈다. 또 한 편으로는 엠비아이에 합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엠비아이는 기술사용료와 피해금액을 추산, 약 1조원대 합의금을 제시했다. 그러자 시마노는 협상을 거부했다.

무엇보다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과연 거대 기업이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회사 기술을 침해했을까’라는 의혹 서린 눈길은 엠비아이에겐 억울하기만 했다.

실제 시마노는 세계 자전거 업계에서 ‘시마노의 부품 없이 완제품 생산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회사다. 2008년 매출액만 2351억엔(약 3조5000억원)에 이르며, 연간 400억엔(약 5000억원) 안팎의 흑자를 내고 있다.

그러나 모두의 염려와는 달리 일본 특허청은 올 4월 엠비아이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 특허청은 피해배상 규모를 적시하진 않았지만 소송비 전액을 원고 시마노에 부담시켰다. 하지만 시마노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 오는 23일 항소심 재판이 예정돼 있다.

여세를 몰아 엠비아이는 중국 특허 소송에도 나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유혁 대표는 오는 17일 회사 임직원과 담당 변리사와 함께 중국으로 출국할 예정이다.

이 밖에 엠비아이는 2건의 미국 특허 심판에서 1건은 승소, 또 다른 1건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한편 독일 뒤셀도르프 지방법원은 지난 9일 앞서 발표된 결정을 뒤엎었다. 시마노가 엠비아이의 특허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진검승부는 이제부터”

다음은 유혁 대표와의 일문일답 내용 전문이다.

-승소한 것 축하한다.
▲시마노사와의 소송을 2004년부터 준비해 왔는데 승소해 기쁘다. 일본 특허청이 엠비아이의 전면 승소를 결정한 것은 우리 특허 관련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시마노사의 앞마당인 일본에서 승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특허권 분쟁은 단기적으로 결정 날 승부가 아니다. 남은 소송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

-반면 독일은 일본 특허청 결정을 뒤엎었다.
▲특허 소송에서 중요한 것은 승소여부가 아니라 특허 기술을 어디까지 인정해 주느냐는 것이다. 이번 독일 판결도 최종 판결문을 받아 기술 인정 여부가 어디까지 인가를 파악해야 정확한 승패 여부를 알 수 있다.

-1조원이라는 금액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시마노가 지난 2003년부터 기술을 무단도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국내 소송 대리인인 법무법인 태평양과 독일 현지 대리인간 파악한 규모다. 1조원 금액은 앞으로 특허 존속기간과 특허권 침해 피해액수와 로열티 등을 감안해 나온 것이다.

-엠비아이의 향후 계획은.
▲그간 연구·개발만을 전문으로 해왔지만 오는 9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초소형 3단 허브내장 변속기 등 3종 변속기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앞으로 국내 자전거 부품의 국산화를 위해 특허권을 적극 방어하고 기술개발에 힘쓰겠다.

-국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국내 자전거 업체들이 영세하다 보니 부품을 개발하고도 결국 해외시장에서 특허권을 뺏기는 사례가 많다. 정부가 육성한다고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업들과 만나볼 필요가 있다.



#■ 엠비아이 특허소송 일지

1999년 12월 엠비아이, 자전거 변속기 관련 국내 특허 출원
2000년 3월 일본 시마노, 동일 기술로 미국 특허 출원
02~07년 엠비아이, 미국(2002) 일본(2004)
유럽(2007) 등 세계 38개국 특허 등록
2007년 10월 엠비아이와 법무법인 태평양, 시마노의
특허 침해 발견. 소송준비
2008년 3월 엠비아이, 독일에서 시마노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 제기
6월 시마노, 미국과 유럽 법원에 엠비아이 특허 무효심판 청구
8월 시마노, 일본 특허청에 특허 무효심판 청구
2009년 4월 일본 특허청, 시마노 패소 판결
6월 8일 미국 법원, 시마노 패소 판결
6월 9일 독일 뒤셀도르프 지방법원, 엠비아이 패소 판결

[박지영 기자] pjy0925@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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