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때 대학교 입학, 자살 기도까지 파란만장한 삶


대한민국 법조 1번지라 불리는 서초동에 가면 기인 아닌 기인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임동언(46) 변호사다. 그는 어린 시절 요즘의 송유근과 같은 천재소년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원조 천재소년’인 셈이다.

임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하는 방법부터 독특하다. 사건 내용을 듣기보다 의뢰인의 진실성을 보고 사건을 맡는다. 아무리 승소 가능성이 높아도 의뢰인에게서 진실성이 보이지 않으면 사건을 맡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인들에게 “그렇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충고(?)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임 변호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험난한 시간을 보내오며 터득한 인생철학이기 때문이다.

이런 임 변호사를 기피하는 이들도 있다. 대한민국 검사들이다. 늘 미소 짓는 표정에 화초나 가꾸며 살 것 같은 온화한 임 변호사지만 법정에 들어서면 180도 돌변한다. 임 변호사가 칼날 같이 예리하고 빈틈없는 논리를 쏟아내면 그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베테랑 검사들도 임 변호사 앞에선 진땀을 뻘뻘 흘리기 일쑤다.

사무실에서 거만하게 사건을 수임하기보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민들의 애환을 들어주는 임 변호사.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를 ‘시민 변호사’라 부른다. 지금부터 원조 천재소년 임 변호사의 인생 풀 스토리를 들어보자.

1976년 서울 관악구 신림 6동 신림시장골목 위 소위 달동네 단칸방에서 소년 임동언은 법조인의 꿈을 꿨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다리가 불편하신 아버지와 행상하시던 어머니, 두 형과 동생 등 여섯 식구가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잠들곤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달동네서 큰 천재소년

소년은 종종 밖에 나가 시장 사람들의 분주한 삶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삶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삶들이 존재하고 어떻게 풍부한 삶이 될 것인가. 우주와 지구의 원리를 공부하여 인류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을 먹게 되었다.

소년은 마음 저편에서 사람들의 사람다운 삶을 위한 삶을 살자고 다짐했다. 1978년 봄 단국대학교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한 임 변호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법학도가 된 그는 생각했다. ‘이 법률을 공부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은 그에게 말했다. 법을 공부하면 더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진다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굶주리는 사람, 병든 사람, 자살하는 사람, 절망한 사람이 많은데 더 많은 분배를 위하여 공부해야 하는 게 아니었나? 이때부터 근원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업을 그만 뒀다. 1978년 여름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왕국회관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신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새벽기도를 하며 갖가지 종교들의 마찰도 지켜봤다.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머리 속은 엉망이었다. 그러다 두개골이 부서지는 큰 사고를 당해 열흘을 꼬박 혼수상태로 보내는 신세가 됐다. 가까스로 의식을 찾은 임동헌의 눈에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들어왔다.

가족 품으로 돌아온 임 변호사는 오랜만에 행복을 맛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서점에서 우연히 석가모니와 예수를 비교한 책을 읽고 번쩍 눈이 뜨였다.


신용불량 변호사, 인생의 진리를 깨닫다

석가모니의 완전한 일대기를 밤 세워 읽어 내려간 임 변호사의 심장은 전에 없이 두근거렸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인간’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그의 삶을 완전히 구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9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간 청년 임동헌의 머릿속에는 ‘자살’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촉망받던 법학도에서 빠칭코 종업원으로 전락한 그는 희망 없는 삶을 억지로 연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좌절만을 경험한 채 2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기울대로 기운 집안 살림을 부양하던 작은형의 충고에 사법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1993년 1차 시험을 보자마자 임 변호사는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그토록 매달렸던 신에게 죽기 살기로 기도하면 대답이 돌아올까. 누구든 기도하면 성령을 만난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기회가 올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고 기도를 올리던 마지막 날.

청년 임동헌은 극적으로 신의 응답을 들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공부를 계속했다. ‘대한민국 6122번째 변호사 임동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변호사 개업을 한 뒤 그는 가난한 의뢰인들을 위한 ‘공짜 사건 전문 변호사’라는 닉네임을 얻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사무실 운영조차 힘들 정도로 세금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2003년 지인이 근무하는 은행으로 대출 신청을 하러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서초 세무서가 그를 신용불량자로 등재해 대출이 불가능한 지경이 된 것이다. 신용불량 변호사. 상처였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패스해 개업한 변호사도 졸지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현실인데 하물며 일반인들은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가 담당한 서민들의 사연은 그야말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러나 임 변호사가 그들 편에 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너무도 많았다. 이른바 전관예우와 학연이 지배하는 법조계는 임 변호사와 같은 ‘아웃사이더’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노가다 변호사’”라고. 서민의 대변인을 자처한 임 변호사는 자신의 삶에 성이 차지 않는다. 그는 “변호사로서 임무에 지금보다 더 충실해야 한다”며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에게 있어 국가는 국민 모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임 변호사는 자신의 국가관을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 문제에도 화제를 옮겼다. 그는 “오늘날 흐트러진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바로 국가의 존재이유를 모르는 과거 통치자들과 소수 국민 때문이다”며 “지나친 퍼주기로 독재 정권의 배를 불리기보다 북한 국민들의 권익을 위해 영리한 거래를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경찰대 존재 의미 있나”

평소 의뢰인 앞에서 한없이 유순하던 임 변호사는 경찰과 검찰의 부조리를 꼬집을 땐 날카로운 열변을 토했다. 그는 경찰과 검찰에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 경찰대를 나와야 고위 경찰간부가 되는 현실이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임 변호사는 “사회의 핵심 권력인 경찰은 4년제 대학을 나온 자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문민 간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경찰대 나온 사람들만 간부로 채용되는 현실에서는 경찰 권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며 “경찰대를 폐지하고 지방자치경찰과 국가 경찰을 분리한 다음 일부 수사권을 주면 민주적 경찰 제도를 확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 역시 구조적인 개혁을 통해 쇄신돼야 한다는 게 임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는 “모든 국민은 정치와 국가가 사회구성원을 위해 존재하길 바란다”며 “거대 권력은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반대 세력이 구축돼야 순기능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순대국에 소주’ 서민 변호사 임동헌

임 변호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인간적이고 털털한 풍모를 칭찬한다. 대부분 서민인 의뢰인이 자신의 아픔을 의지할 수 있는 형님이자 자상한 오빠같은 변호사라는 것.

임 변호사의 서초동 사무실은 다른 변호사 사무실과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넘치는 의뢰인을 위한 대기실은 널찍한 반면 정작 임 변호사 자신의 사무실은 좁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소탈한 인간미로 의뢰인을 감동시키는 몇 안 되는 변호사로 꼽힌다.

오랫동안 임 변호사를 지켜봐왔다는 한 인권단체 관계자는 “늘 구겨진 양복차림을 고수하는 그의 검소함에서 서민 변호사로서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임 변호사님은 고급 음식점보다는 순대국집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을 더 좋아하는 분”이라며 “평소 시에도 조예가 깊어 그분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마음의 짐이 한 결 가벼워 지는 기분”이라고 전했다.

그는 또 “임 변호사님이 단골로 드나드는 순대국집의 종업원이 중국 교포였는데 귀국날 케이크와 못다 준 팁을 챙겨주는가 하면 함께 이별주까지 나누는 모습을 봤다”며 “변호사라는 사회적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소탈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소주한잔이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변호사. 원조 천재에서 시민 변호사로 변신한 임동헌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 빛나 보인다.


#형사사건 피해자 줄이려면 법조계 잘못된 관행 고쳐야 일침

임동언 변호사는 2004년 11월 초 4년간 끌어오던 한 소송에서 승소한 적 있다.

이 사건의 시작은 2001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연수원을 갓 수료한 임 변호사에게 한 공무원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서울 모 구청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던 의뢰인은 자신이 간통과 폭행혐의로 구속될 처지에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 여성은 검찰에게 자신과 간통을 했다고 진술했고 폭행도 당했다며 전치5주의 진단서를 검찰에 제출한 상태였다.

검찰은 법원에 영장을 청구했다. 긴급한 상황에서 의뢰인은 다시 임 변호사를 찾았다. 임 변호사의 노력 덕분에 의뢰인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임 변호사는 “1심 재판을 4년 동안 끈 것도 기록인데 판사도 네 번이나 교체됐다. 증거가 진술밖에 없는 어려운 재판이었는데 피고측에 충분히 진술할 기회를 준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형사사건의 경우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 재판과정이 시급히 개선돼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피고인의 접견제한 문제는 인권보호와 공정한 재판을 위해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임 변호사는 강조했다.

임 변호사는 “형사사건 피고인을 접견하다보면 담당 검사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만나라고 할 때가 있다. 검사가 보는 앞에서 피고인이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없는데도 그렇게 강요한다. 사건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법조인들이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다”라고 말했다.

그는 법정의 증인심문제도도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임 변호사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형사재판에서 증인신문이 너무 형식적이어서 충분한 심리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판에서 심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결국 형사피고인에게 너무 불리한 판결이 나온다. 검찰의 방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반박하려면 변호인에게도 시간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변론이 충분히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이렇게 되면 판사가 검찰측의 손을 들어주게 돼 있다는 게 임 변호사의 설명이다.

임 변호사는 “잘못된 관행의 개선을 통해 형사사건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임동언 프로필
▶ 1963. 12. 17일 출생
▶ 1976. 경남 함양 수동면 도북리 도북국민학교 졸업
▶ 1976. 8. 서울 고입검정 합격
▶ 1977. 1. 고입연합고사 합격
(경제사정으로 입학 못함)
▶ 1977. 4. 서울 대입검정 합격
▶ 1978 단국대학교 법학과 입학 1학년 중퇴
▶ 사법시험 40기 사법연수원
30기 국제통상법학회 회장

[윤지환 기자] jjh@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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