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공로명 편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뉴시스]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뉴시스]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7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통역 미리 불러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거야’ 귀띔해줬다”

- 오히라 내각이 갖추어진 이후에 후쿠다 전 수상이 1979년 6월에 방한을 했다.

▲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이 빈객으로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아주국장직을 내놓고 주카이로 총영사로 발령이 났었는데, 후쿠다 수상 일행을 안내하는 데 보좌하기 위해서 경주·포항 일대를 순찰할 때 수행까지 했었다. 그때 최광수 의전수석이 안내 총책임자로 나섰고, 아주국장인 저도 보좌로서 후쿠다 수상 내외분과 일행을 모시고 여행을 했다. 이때 후쿠다 수상을 따라온 일본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는 지금 아베 수상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씨가 있었고, 모리 요시로 수상도 있었다. 또 요새 일본 보수의 최우익 정치가로 있는, 도쿄도지사 지냈던 사람이 있는데…

- 이시하라 신타로 말씀이신가.

▲ 맞다. 이시하라 신타로도 왔었다. 이때 수행한 국회의원들이 한 대여섯명 있었다.

- 후쿠다 전 수상 그리고 그때 같이 수행했던, 그 후에 큰 정치 인물들이 그 당시 후쿠다파 에 속했던 분들 같다.

▲ 그렇다.

- 그분들이 왔을 때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후하게 대접을 했다는 것은 역으로 국제정세가, 또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인권외교를 내세우면서 한국이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도 일본의 정치인들이 한국의 안보위기감에 대한 배려를 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해석을 해야겠다.

▲ 그렇기도 했고, 동시에 후쿠다 수상은 계속 한일의원연맹의 주요 멤버로서 기시 노부스케 다음에는 후쿠다 수상이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오래 했다. 계속 한국에 지원을 해준 정치가였기 때문에 그런 여러 가지 관계가 상승효과를 낸 거다.

-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후쿠다 전 수상이 방한하고 2주일 정도 후에 카터 대통령이 방한을 한다. 그와 관련해 혹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는가.

▲ 개인적인 이야기가 됩니다만, 후쿠다 수상이 떠났기 때문에 안심하고 카이로를 가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는데 또 가지 못했다. 카터 대통령 방한 행사까지 치르고 가야 했다. 카터 대통령이 공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을 영어로 통역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청와대 만찬 때 만찬사 통역까지 하고 카이로로 떠난다.

- 장관님께서 직접 현장에서 통역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그렇지도 않다. 직접 대면 통역은 최광수 의전수석이 하고, 저는 그저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나운서처럼 읽는 데 불과했다. 대부분 써 있는 기록을 읽으니까 그렇게 크게 힘든 일은 아니다.
카터 대통령 방한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화제가 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는 미주국장이 박쌍용 대사였는데, 미국 측이 남한·북한·미국 3자 회담을 제의한다. 카터·박정희 대통령 공동성명, 그런데 아시다시피 3자회담은 북한의 반대로 성사가 안 됐고, 후에 남한·북한·미국·중국의 4자 회담이 몇 번 열린다.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45분간 한반도 정세를 카터 대통령에게 브리핑했다. 그런데 이때 미국 측이 사전에 우리 측에 철군 문제는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카터가 철군 문제를 이야기하면 언짢게 생각하니까 하지 말아 달라”는 귀띔까지 받았는데, 대통령이 45분간 프리페어드 스테이트먼트를 했다. 그래서 카터 대통령이 굉장히 울그락불그락했다. 몇 분이 기록에도 남겨놨는데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가 쓴 Massive entanglement and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라고 하는 회고록이 있다. 그 회고록을 보면 이 회담이 끝나고 나서 미국대사관 관저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카터 대통령이 화가 나서 말한 내용이 나온다.

- 그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용식 장관도 그때 주미대사로서 와 계셨다. 상황이 이러니까 그때 사이런스 밴스 국무장관이 김용식 장관에게 전해서 이야기를 했고, 김용식 장관이 다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해서, 그 메시지를 다시 미국 측에 전하는 막후의 교섭들이 있었다. 그간의 상황은 김용식 장관의 회고록에도 자세히 쓰여 있다. 연구하시는 분들은 보시면 재밌으실 거다.
그와 관련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왜 45분이나 말씀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요한 회담이 있으면 요약 포인트를 메모해서 말씀한다. 저도 몇 번 봤는데, 몇 번 중요한 인사들이 왔을 때 제가 일본어 통역을 했다. 일본 측이 하는 이야기는 통역할 필요가 없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이야기하시는 건 통역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어는 연배를 봐서도 교육을 봐서도 저보다 더 잘하실 텐데 그 앞에서 통역을 하려니까 항상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먼저 들어오라고 하셔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거야” 하시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미리 말씀하신다.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하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45분이라지만 통역이 있으니까 그 반이다. 메모가 된 발언을 그렇게 하신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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