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강 헤엄쳐 떠난 ‘원조 마린보이’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던 전직 수영선수 조오련씨가 지난 2일 오후 해남군 계곡면 법곡리 자택 연못가에서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전남일보' 취재팀이 조씨가 숨지기 사흘 전 촬영한 것으로 생전 마지막 인터뷰 사진으로 추정된다.

‘원조 마린보이’가 레테의 강(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저승을 흐르는 강. 일명 ‘망각의 강’)을 헤엄쳐 건넜다. 독도를 33바퀴나 돌고 대한해협을 단신으로 횡단하며 한국의 저력을 세계의 알린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7)씨가 지난 4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에 따르면 사인은 심장동맥 경화 및 심근경색으로 확인됐다. 평생 물 속을 누비며 건강체질을 뽐내던 수영 영웅이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뜬 것이다. 고인의 사망 사실이 알려진 직후 타살설, 약물 중독설 등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지만 국과수 발표로 이를 둘러싼 석연찮은 의혹은 완전히 수그러들었다. “환갑을 맞는 2010년 꼭 두 번째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하겠다”며 당찬 목표를 밝혔던 ‘아시아의 물개’는 영원히 하늘 속으로 헤엄쳐 떠났다. 해남 산골을 누비던 소년 조오련은 체계적인 훈련도 받지 않고 17세에 전국대회 2연패를 달성한 ‘타고난 천재’였다. 현역선수시절 무려 50개의 한국 신기록을 쏟아낸 그는 동시에 ‘지독한 독종’으로 불릴 만큼 노력파로 통했다. 도전과 실패, 아픔과 희망으로 점철된 쉰일곱 조오련의 생애를 돌아봤다.


의혹 사라진 영웅의 죽음

평생을 운동으로 다져온 건강 체질이었던 고인의 사망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언론을 통해 비보를 접한 상당수 대중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검을 담당한 국과수는 고인의 직접적 사망원인이 심장마비가 확실하다고 결론지었다. 지난 5일 국과수와 경찰 등에 따르면 이날 국과수 서부분소에서 고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직접 사인은 심장동맥 경화 및 심근경색인 것으로 확인됐다.

응급상황에 빠진 조씨가 발견된 것은 지난 4일 오전 11시 30분 쯤. 집 현관에 쓰러진 조씨는 부인 이성란(44)씨의 119 신고로 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1시간 만인 낮 12시 45분 숨을 거뒀다.

고인의 유해는 교회·가족장을 치른 뒤 지난 6일 발인을 거쳐 자택이 있는 전남 해안군 계곡면 야산에 안장됐다.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며 철옹성 같은 체력을 자랑했던 조씨가 이토록 허무하게 세상을 뜬 이유는 뭘까. 그를 죽음으로 몬 ‘심장마비’의 주원인은 과격한 운동과 극심한 스트레스 등이 꼽힌다. 조씨의 사인으로 밝혀진 관상동맥 경화는 40세 이상 남성 돌연사의 가장 큰 원인이다.

조씨는 내년 있을 두 번째 대한해협 횡단을 준비하며 갖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재정적인 문제였다. 지난해 ‘독도 33바퀴 헤엄쳐 돌기’ 프로젝트 때와 마찬가지로 행사를 지원할 후원사(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애태웠다고 한다.

또 고된 횡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억지로 체중을 조절한 것도 화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한 일간지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체중을 늘리니 몸이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오랜 시간 바다수영을 하려면 저체온증을 막기 위해 체지방을 축적해야 한다. 조씨는 1980년 첫 대한해협 횡단에 나섰을 때 70kg대였던 체중을 90kg대로 늘린 바 있다. 그는 두 번째 횡단 도전을 위해 최근 또 몸 불리기에 돌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급격한 몸무게 변화가 젊은이에게는 부담이 크지 않지만 환갑을 바라보는 조씨에겐 분명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일몽’ 된 마린보이의 러브스토리

고인의 죽음과 더불어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미망인이 된 부인 이성란씨의 절절한 사연이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것은 지난 4월. 달콤한 신혼생활은 불과 108일 만에 끝나버린 셈이다. 이씨는 남편을 잃은 직후인 지난 4일 오후 친오빠와 함께 빈소로 향하던 중 다량의 수면제와 우울증 치료제를 삼켜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다행히 곧바로 위세척 등 치료를 받아 의식을 회복했지만 평생의 반려자를 잃은 부인의 슬픔은 대단했다. 이씨가 음독자살을 기도한 것인지, 단순히 괴로움을 잊기 위해 진정제를 과다 복용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백일몽’으로 끝난 두 사람의 부부관계가 상당히 돈독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과 결합은 순탄치 않았다. 2001년 심장마비로 전 부인과 사별한 조씨는 한때 술에 빠져 고된 나날을 보냈었다. 이씨 역시 11년 전인 지난 1998년 전 남편과 이혼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조씨가 사별의 아픔을 다스리기까지는 꼬박 5년이 걸렸다. 고향인 전남 해남의 한적한 산 속으로 숨어든 조씨는 그곳에 터를 잡고 촌부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상처는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마침내 올해 초, 운명적인 만남이 수영 영웅의 심장을 울렸다.

조씨의 마음을 움직인 여인은 다름 아닌 어린시절부터 한 동네 에서 친형제처럼 지내던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죽마고우를 사이에 두고 어색한 첫 만남을 한 두 사람. 띠 동갑을 넘어서는 나이차가 있었지만 상처투성이인 두 남녀의 교감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구처럼, 남매처럼 인연을 이어가던 두 사람은 봄기운이 만발하던 지난 4월 18일 가족, 친지들의 축복을 받으며 조촐한 식을 올렸다. 마을 회관에서 치러진 잔치에는 조씨의 장성한 두 아들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켰다.

웨딩드레스대신 고운 계량한복으로 치장한 이씨의 모습은 단아한 신부의 자태, 그 자체였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곧 마을에서 소문난 잉꼬커플로 유명해졌다.

이씨는 남편을 위해 매일같이 손수 보양식을 만들어 대접했고 조씨는 맥주병인 아내에게 직접 수영을 가르치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조씨가 내년 대한해협 횡단 준비를 위해 제주도로 내려가 훈련에 매진할 때도 이씨가 따라나서 뒷바라지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고된 훈련 끝에 해남 신혼집으로 돌아온 부부가 꿈같은 휴식을 만끽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조씨는 영원히 아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미완성으로 남은 고인의 도전만큼이나 주변을 안타깝게 한 것은 아내 이씨와의 못 다한 사랑이었다.


국가적 영웅
‘가족장’으로 보낸 수영연맹?

한편 고인에 대한 애도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이어지는 가운데 장례 절차와 형식을 놓고 미묘한 잡음이 일고 있다.

한때 ‘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며 수십 개의 한국 신기록을 쏟아낸 국가적 영웅을 연맹이 ‘수영연맹장’이 아닌 개인 가족장으로 보낸 까닭이다. 수영연맹장은 말 그대로 ‘수영계의 국장(國葬)’이다. 고인의 생전 업적과 유명세를 감안했을 때 수영연맹장으로 치러야 했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 대한수영연맹의 파벌 갈등이 배경이 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불거졌다. 고인은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수영계의 지나친 파벌 다툼으로 인해 배척당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해 파문이 인 바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해당 인터뷰를 언급하며 협회가 ‘과거의 앙금’ 때문에 고인에 대한 예우를 꺼리는 게 아니냐는 식의 논리를 폈다. 논란이 불거지자 대한수영연맹 측은 “연맹장을 치를 수 있는 것은 현직 협회장 혹은 현직에서 공을 세우다 돌아가신 분에 한한다”고 선을 그었다.

고인이 지난 20여 년 간 수영계를 떠나있었고 관련 규정이 없어 ‘특별 케이스’를 두는 것은 형평성과 절차에 있어 문제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대신 고인의 고향인 전남수영연맹이 나서 ‘국민장’급에 해당하는 ‘전국수영인장’을 제의했지만 유족 측이 정중히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와 연맹의 불화설은 오래전부터 회자돼 왔다. 고인은 과거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때 수영연맹이사로 재직했었지만 입바른 소리를 자주 한 탓에 제명당했다”며 “연맹도 파벌이 있다. 파벌에 못 끼면 배척당한다. 나도 그런 경우다”고 토로했다.

파벌싸움과 관련된 수영연맹의 폐단은 최근 박태환(20·단국대)의 세계선수권 부진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막노동하며 모은 돈으로 수영강습

수영계에서 조씨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을 해가며 수영강습을 받았고 ‘무명의 촌놈’이라는 이유로 모든 팀이 무시할 때 타고난 재능하나로 대회에 출전, 전문 선수 이상의 기록을 냈다.

1952년(주민등록상 생년. 실제 고인은 1950년생으로 알려졌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조씨는 실개천을 수영장 삼아 헤엄치는 법을 익혔다. 일찌감치 수영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한 그는 1968년 학교를 자퇴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간판가게 잔심부름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당시 YMCA 수영장에 등록했지만 서울 선수들은 그를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명의 시골 소년은 소속팀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어느 학교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무적선수’로 1969년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서울 예선전에서 자유형 400m와 1500m 등 두 종목 1위를 휩쓴 그는 순식간에 서울시내 팀들이 모두 탐내는 영재로 급부상했다.

양정고에 정식으로 스카우트된 조씨는 고2 재학시절인 1970년 제6회 방콕 아시안게임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아의 스타로 거듭났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자유형 400m와 1500m 금메달을 휩쓸며 대회 2연패 신화를 이룩한 조씨는 ‘원조 마린보이’로 명성을 날렸다. 1976년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한 조씨는 이후 한국 신기록을 50차례나 갈아 치우며 한국 수영계의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1978년 은퇴한 뒤에도 ‘수영 영웅’의 도전은 계속됐다. 1980년 8월11일 부산 다대포 앞 방파제를 출발해 13시간16분 만에 일본 쓰시마섬(대마도)까지 대한해협 48㎞를 횡단했고 2년 뒤에는 도버해협을 9시간35분 만에 건넜다.

조씨는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수영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었다.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는 2010년 다시 대한해협을 건널 계획을 세운 것. 최근 제주도에 캠프를 차리고 훈련에 매진했던 고인이었다.

“한국인의 저력과 60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던 고인의 다짐은 끝내 못 다 핀 꽃이 되어 지고 말았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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