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빛낸 ‘글로벌 코리언’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일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고, 금위 환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2006년 반기문 UN사무총장이 우리국민의 저력을 보여줬다면, 지난해 11월에는 뉴질랜드 최초로 한국인 멜리사 리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고국 브랜드 가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켰다. 두 사람 모두 고국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표현하고 자부심을 보이고 있어, 바라보는 사람들의 뇌리에 ‘대한민국’ 네 글자를 각인시키고 있다. 또한 그들을 닮고 싶어 하는 젊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의 미래 전망도 밝다는 분석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멜리사 리 뉴질랜드 국회의원에 대해 알아본다.

세계 속 한국인의 위상이 대단하다. 주로 일부 유명인들이 명위를 떨치던 과거와는 달리 전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세계 속의 한국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인종들과 어울리며 우리나라의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연예인들이 문화를 지배한다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멜리사 뉴 의원의 경우는 세계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평화는 물론 해당단체 및 나라의 주요직책 수행으로 ‘대한민국’브랜드 가치를 높인다. 또한 두 사람은 자수성가형 성공가로 알려지면서 그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대한민국의 미래로 한층 밝게 만들고 있다.

실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이미지는 높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차기 대권후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 총장의 행보는 연일 언론은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지난 10일 휴가차 열흘간의 일정으로 고국을 방문해 여러 행사에 참여하며, 특유의 밝은 모습과 친근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어 더욱 주목받는다. 반 총장의 이번 방한은 유엔 직원에게 2년마다 주어지는 휴가에 따른 비공식 방문이다.

그는 귀국 인터뷰에서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난 2년 반 동안 물심양면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성원을 해주신데 대해 아주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며 시종일관 웃음 띤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반 총장은 휴가 중임에도 유엔협회세계연맹 총회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환경포럼, 여수엑스포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국제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한승수 총리를 비롯한 정부관계자들도 잇달아 만났다.


‘영어신동’으로 유명

반 장관은 어릴 적부터 ‘영어신동’으로 통할 만큼 외국어 구사능력이 남달랐다. 그는 적십자사와도 인연이 깊다. 충북 음성에서 출생한 그는 1962년 충주고 3학년 시절, 미국 정부가 주최한 영어웅변대회에 출전해 입상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이 때 인생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계기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동반자’(소울 메이트)와 그의 ‘비전’이었다. 인연의 배필이 된 지금의 부인 유순택 여사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이 시절이다. 반 장관은 당시 충주여고 학생회장이던 유 여사와 충주고와 충주여고 학생단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첫 대면했다. 그 뒤 영어 웅변대회 입상으로 미국 방문 길에 오르던 환송식에서 유 여사는 충주여고 대표로 반 장관에게 꽃다발과 복주머니를 만들어 안겨준 것이다. 그가 외교관의 꿈을 키운 것도 미국 적십자사 주선으로 이 때 워싱턴에서 존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다.

반 장관의 인생에 후덕한 자양분을 공급해 준 인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인 신현준(88)씨다. 신씨는 늘 “타인과 다투지 말고 덕을 베풀고 살라”는 교육 방식을 고수하며 아들을 챙겼던 것이다. 반 장관이 ‘적(敵)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겸손한 태도와 주변인과도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반 장관 어머니의 교육에서 기인했다는 얘기다.

1970년 제3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반 장관은 그 이듬해인 1971년 유 여사와 결혼해 월세 10만원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는 더구나 부드러운 인상이다. 2004년 외교부 장관에 올라 북핵문제, 주한미군 감축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등 국제적인 이슈가 보도될 때마다 누구보다 바빴던 인물이다. 그는 이 때 장관답지 않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학자적 외모로 대중들에게 탁월한 외교술을 선보였다. 반 장관이 대중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2004년 6월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대인 기피증으로 나타났다. 당시 국내 주요언론들은 취약한 외교 인프라와 외교협상 부재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 안에는 반 사무총장(당시 외교통상부 장관)도 있었다.

정치권과 진보단체에서는 반 총장의 외교협상은 “미국의 부시형 공개 경고와도 닮았다”며 ‘친미적 외교장관’이라는 공격적 비난이 잇따랐다.

반 장관은 당시 이라크 무장단체들에 피랍된 김선일씨를 구하기 위해 알자지라 TV동경 특파원을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영어로 협상했다. 그러나 결국 김선일씨가 피살되자 모든 책임은 반 장관의 몫이 됐다. 무엇보다 비슷한 시기에 피랍된 일본인은 무사히 석방돼 당시 일본의 협상채널(민간구호 활동과 종교적 접근 등)과도 비교됐다.

반 장관은 이로 인해 한동안 사람과의 만남을 꺼려했다. 그는 당시 “너무 매도당해 사람 만나기가 무섭다”며 “최근 일련의 사태로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을 만나지 않고 있다”고 말할 만큼 심적 고생이 심했던 것이다.

[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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