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산 증인, 위기 딛고 민주화 이끌어

지난 20일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치뤄진 뒤 이희호 여사가 곁에서 오열하고 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입관식을 마친뒤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향하고 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왼쪽)와 이희호 여사.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화환을 김 전 대통령의 영전에 바치는 북한 특사..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운구 행렬을 따르고 있다.

최근 건강악화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결국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한국 사회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는 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과 동시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통령이기도 했다. 한국사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한편, 남북회담을 처음으로 성사시킨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격랑의 시대에서 파란만장한 살다간 김 전 대통령의 삶을 짚어봤다.

최근 건강을 회복중인 것으로 알려졌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거했다.

당시 치료를 맡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김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 서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김 전 대통령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된 것은 이날 오전부터였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오늘 오전 9시쯤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져 의료진이 혈압상승제 등을 이용해 집중 치료를 했지만 결국 김 전 대통령은 회복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오후 1시35분쯤 심장 박동이 정지했다가 5분 뒤인 40분쯤 다시 돌아오는 등 위급한 상황을 맞았고 결국 서거했다.


건강악화 끝에 서거

이에 앞서 지난 7월 13일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은 7월 23일 폐색전증이 나타나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다. 그동안 혈압 등 건강수치가 급격히 떨어졌다가 오르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됐다.

갑작스런 김 전 대통령의 서거 는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불과 87일만이어서 충격을 더하고 있다. 한 해 두 전직 대통령이 서거한 셈이기 때문이다.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은 18일 논평을 통해 “서슬퍼런 독재의 서슬에 굴하지 않았고, 경제파탄도 거뜬히 넘어오신 당신, 반세기 갈라진 채 원수로 살아온 민족이 한 동포임을 알게 해준 당신을 보낼 준비가 아직 돼 있지 않다”며 “아직도 국민들은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노 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은 슬픔이 아직도 크기만 한데 당신마저 가시다니 2009년은 잔인한 한 해”라며 “편안히 가시라”며 조의를 표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날 “큰 정치지도자를 잃었다”며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향한 고인의 열망과 업적은 국민에게 오래도록 기억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영욕의 85년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사실 순탄했다고 하기 힘들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했다. 군부정권 시절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생활, 10년의 망명과 연금생활을 넘겨왔다. 그럼에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고 정권교체를 이룬 대통령이 돼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김 전 대통령의 삶은 한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전남 목포 앞 섬마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한 덕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해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졸업 후 그는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해운회사인 목포상선에 취직했다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목포일보를 경영하는 등 언론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그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돼 총살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딛는다. 첫 출마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1956년 장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으나 정치인생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강원 인제로 옮겨 치른 4, 5대 총선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마신 그는 1961년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됐지만 사흘 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의원등록도 못해 보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의 불행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59년 첫부인 차용애 씨와 사별하고 3년 뒤인 1962년 지금의 아내이자 동지인 YWCA 활동을 하던 이희호 여사와 재혼, 가정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재혼 열흘 만에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한 달여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대선 패배 이후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역전승을 거두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90여만표 차이로 패배한다.


잇따른 실패와 위기

이듬해인 1972년 신병 치료를 위해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귀국을 거부하고 유신반대 성명 및 망명을 선언 했다. 해외에서의 민주화 회복을 위한 정치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박정희 정권에게 김 전 대통령의 행보가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정보기관에 의해 1973년 8월 8일 당시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돼 강제로 한국에 끌려 왔다. 당시 이 사건으로 한국과 일본, 한국과 미국과의 외교마찰이 초긴장 사태까지 갔다.

김 전 대통령이 보트에서 바다로 던져져 살해당하기 직전, 미국과 일본의 발빠른 개입으로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수난은 계속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 집권 직후인 1980년 7월에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그 후 미국의 강한 압력에 의해 1982년 형의 집행이 정지되면서 다시금 미국으로 건너가 1985년에서야 귀국했다.

그가 다시금 정치권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1987년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사실상 정권교체는 좌절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1992년 대선에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 된 것은 1997년이었다. 네 번째 대통령 도전이 마침내 빛을 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한국은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경제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570억 달러의 융자를 받았어야 했을 정도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적극적인 외자 유치에 나서며 IMF 구제금융을 조기에 상환에 성공 했다.

특히 그의 대통령 업적에서 주목받았던 것은 바로 햇볕정책이다. 2000년 그는 오랜 민주화운동, 그리고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세계의 추모 속속 도착

이런 그의 인생사 때문일까. 이미 김 전 대통령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이름이 높다. 가깝게는 북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례적인 조의 방문단 파견이 이뤄졌다. 이는 현재까지 있었던 북한의 대남 조문단에서는 최고의 예우다. 김 위원장은 사망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조전을 보낸 바 있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용감한 투사였다”며 “그의 서거로 슬픔에 빠졌다”고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빌 클린턴 전 미대통령도 18일 빌클린턴재단 홈페이지에 애도 성명을 올렸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면서 “햇볕정책이 한국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는 김 전 대통령 영결식에 조문단을 파견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연보

▶1924년 전남 무안군 하의면 후광리 출생
▶1943년 목포상고 졸업
▶1961년 5대 민의원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당선
▶1963~1967년 6,7대 국회의원 당선
▶1971년 7대 대통령 출마 낙선
▶1971년 8대 국회의원 전국구 당선
▶1972년 일본에서 유신반대 첫 성명발표
▶1973년 동경납치 살해 미수 사건 발생
▶1976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1978년 가석방 후 장기 가택연금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사형선고
▶1982년 미국 망명
▶1985년 귀국 후 가택연금
▶1987년 평민당 창당 13대 대선 출마 낙선
▶1988~1992년 13·14대 국회의원 당선
▶1992년 14대 대선 낙선 이후 정계 은퇴 선언
▶1995년 정계 복귀,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노벨평화상 수상
▶2003년 대통령 퇴임
▶2009년 8월 18일 서거

[강필성 기자] feel@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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