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달러 진실게임이 ‘온화한 미실’을 깨웠다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노무현 재단에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정치공작 분쇄 비대위’회의에서 한명숙 전 총리와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 등 참석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검찰의 사정 칼날이 ‘온화한 미실’을 깨웠다. 한명숙(66) 전 국무총리가 대한통운 로비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의 소환 통보를 무시하면서 현 정권과 검찰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부드러운 외모와 세련된 언행으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꼽히는 한 전 총리. 그는 온화한 외모 뒤에 민주투사로 활약한 행동력과 장관, 국회의원을 거치며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춰 전 정권 실세로 등극,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인물로 평가된다. 야권 내부에서는 드라마 ‘선덕여왕’ 속 여걸 ‘미실’(고현정 분)과 필적할 만 하다는 평도 나온다. 특히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한 전 총리에게 있어 이번 검찰과의 공방은 앞으로의 정치력을 보장받기 위한 결전이다. 5만 달러 수수 여부를 놓고 진실게임으로 번지고 있는 한명숙 전 총리와 검찰의 신경전을 집중 조명했다.

참여정부 인사들을 향한 검찰의 사정 칼날이 춤추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파트너로 참여정부 실세였던 한명숙 전 총리가 검찰의 첫 목표물이다. 대한통운 로비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권오성)는 지난 9일 한 전 총리에게 ‘11일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검찰, ‘근거 없는 자신감’ 아니다

검찰은 한 전 총리가 지난 2007년 초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구속)으로부터 한국남동발전 사장 선임과 관련한 인사 청탁 등과 함께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5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곽 전 사장은 “당시 양복 주머니 양쪽에 각각 2만, 3만 달러씩을 넣고 들어가 한 전 총리에게 직접 전달했다”는 진술을 했다. 이에 대해 한 전 총리 측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때와 똑같은 수법의 정치보복이라며 결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한 전 총리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때와 마찬가지로 정치보복 수사이기 때문에 소환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곽 전 사장이 정말 총리공관에 출입했는지 당시 CCTV 녹화 기록과 방문 내역만 뒤져도 금방 진실을 가릴 수 있다는 게 한 총리 측 주장이다.

검찰이 한 전 총리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무리한 소환 조사를 강행하려 한다는 얘기다. 더구나 곽 전 사장이 진술을 여러 차례 번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 전 총리 측의 공세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곽 전 사장은 문제의 5만 달러를 “양복 주머니에 넣고 들어갔다”고 했다가 “봉투에 넣어 들어갔다”고 말을 바꿨다. 또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전달한 시점도 오락가락해 검찰 내부에서도 관련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소환 통보를 하기 전 공관 출입 기록과 곽 전 사장이 주장한 동선, 당시 정황 등 구체적인 사실 확인을 상당부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때문에 검찰이 한 총리 측에 소환 통보를 한 것 자체가 혐의입증에 대한 강한 자신감으로 볼 수 있다.


여당 수사 균형 맞추려 한명숙 희생?

검찰은 한 전 총리가 출석하는 대로 금품수수 경위와 대가성 여부 등을 조사한 뒤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한 전 총리가 정치계 원로인 점 등을 감안해 소환에 불응하더라도 체포영장 청구 등 강제 수단은 동원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한 전 총리가)소환에 응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수사를)무리하게 진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여당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스테이트월셔 골프장 로비 의혹 사건에 연루된 공성진, 현경병 한나라당 의원도 한 전 총리와 같은 11일 소환이 예정된 까닭이다. 전·현 정권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같은 날 나란히 검찰에 불려 들어가는 셈이다.

여당 소속의 두 의원들 역시 한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이 소환 통보를 한 이상 상당 부분 혐의가 입증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우세해 이들의 거취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렇듯 여야를 넘나드는 검찰 수사를 두고 안팎에서 적잖은 우려가 쏟아지는 상황이다. 전 정권실세와 현 여당 정치인을 동시에 겨냥한 것은 결국 검찰의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반증이란 주장이다. 또 최근 검찰의 수사 상황 ‘흘리기’가 재연되고 있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의 실수를 그대로 답습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정치인 소환조사가 눈앞에 다가오자 검찰 수뇌부의 움직임도 급박해졌다. 김준규 검찰총장은 최근 노환균 서울중앙지검장을 만나 수사 상황을 보고받고 소환 일정 등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달 들어 정·관계 표적수사 논란이 일고 있을 뿐 아니라 연일 수사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는 등 정치적인 부담이 커지는 가운데 관련 수사를 깔끔하게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한명숙 지켜라’ 민주당 동상이몽

민주당은 적극적으로 ‘한명숙 지키기’에 나섰다. 민주당은 이번 검찰 수사를 정치공작으로 규정하고 초당적 대응을 천명한 상태다. 물론 민주당이 상임고문역인 한 전 총리를 당 차원에서 옹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부에는 보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게 정치권 의 분석이다.

먼저 민주당 지도부 등 주류 측의 1차 목표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반면 친노로 구분되는 당 내 비주류는 신당 창당을 위한 원동력으로 한 전 총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계산을 끝낸 눈치다.

특히 내년 6월 2일로 예정된 2010 지방선거는 이명박 정부를 향한 심판적 성격이 강하다. 민주당 등 범야권 측은 최근 세종시 논란에 민심이 흔들리는 충청권을 중심으로 현 여권에 대한 ‘응징’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다.

특히 핵심 중 핵심인 서울시장 선거는 난투극에 가까운 여야의 혈전이 예상된다. 현역 프리미엄을 앞세운 오세훈 서울시장이 우세한 가운데 한나라당 내부에서만 원희룡, 나경원, 정두언 의원이 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제1야당인 민주당이 ‘오세훈 대항마’로 내놓은 유력한 카드다. ‘노무현 적통’으로 분류되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있지만 강경파인 유 전 장관 보다는 온화한 이미지의 한 전 총리가 민심을 얻기 쉽다는 계산이다.

‘리서치뷰’가 지난달 20일 서울지역 유권자 933명을 대상으로 전화 ARS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신뢰수준에 서울 ±3.3%P)를 벌인 결과, 서울시장 후보군은 오세훈 시장이 33.3%,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9.0%로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4.3%p에 불과했다. 15.5%의 지지율을 얻은 노회찬 대표가 범야 연합 차원에서 한 전 총리와 손을 잡는다면 오세훈 시장의 입지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민주당은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선거 구도를 흔들려 한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처지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정치 보복성 수사를 통해 원성을 샀던 검찰이 제1야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를 흠집 내기 용으로 언론에 흘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미경 민주당 사무총장도 “한명숙 전 총리는 우리당의 상임고문이고 또 여성총리로서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누구보다 청렴하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강력한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지지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홍사덕 꺾은 카리스마

한명숙 전 총리는 여성 대표성과 국정운영의 경험을 두루 갖춘 인물로 평가된다. 오랜 기간 재야 여성운동의 대모로 활약한 그는 국회의원과 초대 여성부 장관, 환경부 장관 등을 지내며 범야권 여성 정치인 가운데 가장 풍부한 국정 경험을 갖고 있다.

이화여대 불문과 졸업 후 1974년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를 지내며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2년 간 옥고를 치른 한 전 총리는 80년대 가족법, 남녀고용평등법, 성폭력처벌법 등의 제정에 앞장섰다. 90년대 들어서는 대표적인 여성단체인 여성민우회와 여성단체연합을 이끌었다.

DJ정부시절 16대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한 뒤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냈고,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환경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장관 재직 당시 부처 장악력이 합격점을 웃돌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 환경처 환경보전대책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참여연대·방송개혁국민회의 공동대표 등 정부자문 및 민간분야의 다양한 경험도 쌓았다.

1997년 민주당 창당 때 정계에 입문한 뒤 온화함과 탁월한 조정능력으로 주가를 높인 한 전 총리는 재야운동을 함께 했던 김근태 전 의원과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지만 타 계파에서의 신임도 두텁다.

17대 총선에서는 고양 일산갑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낸 5선의 한나라당 홍사덕 전 의원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프로필

▶출생 - 1944년 3월 24일 평남 평양
▶학력 - 이화여대 불문학과 졸업
-한국신학대 선교신학대학원 신학석사
-이화여대 여성학과대학원 여성학 석사

주요경력
▶74∼79년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
▶89년 한국여성단체연합 가족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
▶90∼94년 한국여성민우회 회장
▶93∼96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2000∼2001년 제16대 국회의원
▶2001∼2003년 초대 여성부 장관
▶2003∼2004년 환경부 장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국정과제
추진특별위원회 회장,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2004∼2005년 1월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2005년 4월∼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2005년 5월∼ 열린우리당 당혁신위원회 위원장
수상경력
▶98년 국민포장(여성지위 향상과 남녀평등 촉진 기여)
▶2005년 청조근정훈장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사진-맹철영 기자] phot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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