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으로 인류화합’ 힘쓴 ‘큰 어른’


지난 16일 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 1주기를 맞았다. 김 추기경은 당시 47세였던 1969년 3월 28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였고,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남경대주교 유핀 추기경과 함께 세 번째였다. 김 추기경은 ‘성직자’에만 머물지 않고 민주화를 위한 날카로운 비판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1979년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가장 마음이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을 꼽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하며 자신을 낮춘 마음 따뜻한 할아버지였다. 김 추기경은 평소 사랑을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성직자로 추앙받고 있다. 김 추기경이 선종한 뒤에는 개신교, 한국 정교회, 불교, 천도교 등 각 종파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김 추기경 선종 1주기를 맞은 지금 각계 각층에서 추모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김 추기경 탄생 및 학창시절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김 추기경은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경북 군위군으로 이주했고, 군위 보통학교(현 군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김 추기경이 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 아버지가 사망했다. 어머니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면서 김 추기경을 엄격하게 키웠다. 그의 어린시절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읍내 상점에 취직해 장사를 배운뒤 스물다섯 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학업과 신앙의 영향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33년 김 추기경은 군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이사했다. 이때 대구에 있는 대구 성 유스띠노 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한다. 대구 성 유스띠노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울교구의 소 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에 편입, 1941년 4월 일본 도쿄 상지대학교(Sophia University) 철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김 추기경은 독립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김 추기경은 3년 뒤 일본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당해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고, 이 때문에 학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상지 대학교에 복학, 1946년 12월에 귀국했다. 1947년 김 추기경은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다. 이후 김 추기경은 1951년 9월 15일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 추기경 서임

1969년 3월 28일 김 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 됐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였고 아시아에서는 세 번째였다. 당시 나이 47세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 교구장 대지규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김 추기경은 1974년 서강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77년 미국 노트르담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일본 상지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턴홀대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도 김 추기경은 1994년 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1995년 타이완 후젠가톨릭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1997년 필리핀 아테네오대학교 명예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독재정권에 맞서 목소리 높여

김 추기경은 독재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1971년 전국에 생중계 된 성탄미사에서 김 추기경은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이런 법을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며 독재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지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금됐을 때에도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직접 찾아 면담, 당시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다 결국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인간 박정희가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며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도 맞서 목소리를 높였다. 12.12 사태 이후 김 추기경을 찾아온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며 독재 정권을 비판했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으로 피신해온 학생시위대를 검거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학생들을 체포 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한 김 추기경의 말은 암울했던 시절의 송가처럼 여겨졌다. 김 추기경은 종교와 사회를 다른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신념 때문에 김 추기경은 종교계에서 정치참여 문제로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훗날 김 추기경은 이런 시선들이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회고했다.


선종 1주기, 추모행사 잇따라

김 추기경 선종 1주기를 맞아 각계각층에서 추모 행사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평화화랑에서 김 추기경의 삶을 되돌아보는 사진전이 열렸다. 행사는 평화방송과 평화신문,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공동주관했고,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주최했다. 이날 사진전에서는 김 추기경의 유년시절 모습과 추기경 사임 당시 모습, 독재정권 시절 활동 모습 등 총 120여점이 전시됐다. 16~28일 까지는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전시된다.

16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추모미사가 열렸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선종 1주기인 16일부터 다음달 28일까지를 공식 추모기간으로 정했다. 21일 오전 11시에도 용인공원묘역 성직자묘역에서 염수정 주교 주례로 추모미사가 예정돼 있다.

서울 성모병원에서도 김 추기경 선종 1주기를 앞두고 다양한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병원장 홍영선)은 16일부터 ‘당신은 사랑입니다’라는 주제로 김 추기경을 추모하는 영상전, 음악회, 추모미사, 장기기증운동 등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병원 1층 로비에서 열리는 영상전은 열흘 동안 김 추기경이 환우와 함께한 사진 등 30점이 전시되고 추모영상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가 상영된다. 또 16일 오후 4시30분부터 병원 1층 로비에서 재즈가수 윤희정, 나무자전거, 팝페라 가수 임형주, 뮤지컬 배우 이연경 등이 참여한 가운데 무료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16~17일에는 병원 1층에서 장기기증운동이 실시됐다.


김 추기경이 남긴 것 ‘사랑’, ‘나눔’, ‘감사’

김 추기경이 선종하자 종교와 이념 등을 넘어 추모행렬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이때만큼은 우리사회에 갈등은 없었다. 김 추기경이 남긴 가장 큰 재산인 ‘사랑’, ‘나눔’, ‘감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서울 명동성당~용인 천주교 공원묘원 성직자 묘역까지 김 추기경 운구 행렬이 지나는 곳은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김 추기경은 선종 후에도 몸소 ‘나눔’의 미덕을 실천했다.

김 추기경의 장기가 두 사람에게 기증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다. 본부 측은 당시 “김 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 문의가 쇄도했고 실제로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 수도 많이 늘었다”면서 “선종 이후 5일까진 기증 희망자가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밝혔다. 김수환 추기경은 유언으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대한민국의 심금을 울렸다. 김 추기경의 뜻을 이어받아 ‘감사’와 ‘사랑’ 나누기 운동이 추진되기도 했다. 이렇게 김 추기경은 우리에게 ‘사랑 바이러스’를 남기고 떠났다.


#김수환 추기경 어록

故 김 추기경은 생전에 이 사회를 향해 많은 말들을 남기고 떠났다. 다음은 김 추기경이 남긴 어록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년 3월9일)
▲“6·10 항쟁 때 이곳(명동성당)에는 많은 학생들이 들어와 농성 시위를 하고 있었고, 신부님들, 수녀님들까지 들어와 있었습니다. 당국은 이런 상황이어서 경찰력을 투입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분명히 공권력 투입의 통고라고 보고, 만일 그런 경우에 ‘맨 앞에서는 저를 보게 될 것이고, 제 뒤에는 신부님들,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MBC 인터뷰, 1998년 5월 20일)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는 여러분이나 저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세상사람 모두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수라는 처지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서울구치소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1999년 7월 2일)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 강론, 1994년 4월 24일)
▲“성화를 여기 밝힌 목적은 장애자 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이가,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이가 이 횃불처럼 장애자에 대한 사랑의 불을 밝히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애인 올림픽 성화 명동성당 안치 및 장애인을 위한 미사 강론, 1988년 10월 15일)
▲“내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직할 때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낮은 자리’에 찾아가 ‘작은 이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바싹 귀를 기울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무감에서 나온 ‘땜질식 사랑’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사랑하라.”(김 추기경이 남긴 유언)

[전성무 기자] bukethead@nate.com


##2009년 3개의 ‘큰별’ 지다

2009년에는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거성’이 3개나 떨어졌다. 고 김수환 추기경 선종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잇따라 서거했다. 이들 3명의 거성은 닮은꼴이다.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김 추기경은 생전 신앙과 사회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고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종교와 이념갈등을 넘어선 정신적 대들보였다. 고 노 전 대통령도 군부독재 정권 치하에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쳤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는 등 한국 민주화에 앞장섰고, 정권을 잡은 뒤 서민정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 김 전 대통령도 한국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역사’로 평가된다. 노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운동에 온몸을 던졌다. 그는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대통령 재임당시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 내며 남북 화해모드를 조성했다는 업적을 남겼다. 이 같은 공적이 인정 돼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는 3명의 ‘거성’을 떠나보냈다. 하지만 추모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이들이 암울 했던 한국 현대사의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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